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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묵 기고] 애틀랜타도 기업 ‘메세나’ 가 필요하다

애틀랜타 기업에도 메세나가 필요하다

최진묵 목사
카페로뎀 대표

애틀랜타에 한인인구가 늘고, 그들의 자녀세대의 미국 사회 진출은 한인 커뮤니티의 밝은 미래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재능있는 한인 자녀들이 예체능, 과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한민족의 영민함을 미국 사회에 유감 없이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재능과 실력이 특출함에도 불구하고 가정 사정의 어려움 때문에 재능 발휘의 기회를 얻지못한 채 그 꿈을 접는 청소년들 또한 적지 않다. 한인 커뮤니티가 힘을 모아 재능과 실력이 있는 2세대들에 관심을 가지고 후원할 시점이 되었다고 여겨진다.

이탈리아의 메디치(Medici)가는 13세기부터 17세기까지 피렌체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끼쳤던 가문으로 음악과 미술, 문학 등 각 분야의 예술가들을 후원, 유럽에 예술과 인문주의를 융성하게 만들어 르네상스의 탄생과 발전을 이끌어내는 큰 역할을 했다. 피렌체에는 귀족과 자본가가 예술인들을 후원하는 제도(patronage)가 14세기부터 있었는데 자본을 소유한 가문들이 사회적 책임을 가지고 문화를 후원하고 보존했던 것이다. 후원제 분에 가난하지만 재능있는 예술가들이 문학, 음악, 그림, 조각, 건축 등 다양한 분야에서 위대한 작품을 창조해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남길 수 있었다. 갈릴레오, 미켈란젤로, 다빈치, 단테 등 세계문화사를 이끈 위대한 인물들이 후원을 받았다.

그런가하면 메디치 가문의 문화정신을 계승한 현대의 유수한 기업들이 문화예술에 대한 지원을 통해 사회에 공헌하는 활동을 하기도 하는데 이를 메세나(Mecenat)라고 한다. 메세나라는 말 자체는 로마시대 재상 갈리우스 클리니우스 마에케나스(Gaius Clinius Maecenas 70 - 8 BC)라는이름에서 유래됐다. 로마의 시성이었던 베르길리우스와 ‘카르페 디엠’으로 유명한 호라티우스를 재정적으로 지원해 주었던 실존 인물이다.

메세나가 지금의 뜻으로 사용된 것은 체이스 맨해튼 은행의 회장이었던 데이비드 록펠러가 기업의 사회공헌 예산 일부를 문화예술 활동에 할당하자고 건의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1967년 미국에서 기업예술후원회가 발족하면서 이 용어를 처음 쓴 이후 , 각국의 기업들이 메세나협의회를 설립하면서 메세나는 기업들의 각종 문화후원 활동을 통틀어 일컫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한국메세나는 1994년 설립되었는데 2015년 현재 230여 개의 회원사가 협회와 함께 하고 있다.



메세나의 사례를 들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잘츠부르그 뮤직 페스티발이다. 빈 필하모닉이 대표 오케스트라로 모든 주요 공연에 참여하는 것은 물론 오페라, 연극, 콘서트, 미술, 학술 등 페스티벌에서 벌어지는 모든 문화활동을 세계적인 자동차회사 아우디가 후원한다. 지난 2011년 차이코프스키 국제 콩쿠르에서는 성악 남녀 모두 1위, 피아노 2-3위, 바이올린 3위에 한국인이 입상했다. 피아노 2위에 입상했던 손열음은 이미 2005년 루빈스타인 국제 피아노 콩쿠르 3위, 2009년 반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 2위를 했는데 금호아시아나 문화재단 제1회 금호음악인상 출신이다. 2004년 금호 음악인상 제1회 수상자로 선정된 이래 금호아시아나 문화재단의 꾸준한 지원을 받아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됐다.

손열음은 “자신을 키운 건 8할이 메세나였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장애인 부모를 둬 가정형편이 어려워 피아노 없이 피아노를 배운 문지영은 부영그룹의 재정지원으로 제공된 피아노로 하루 10시간 이상 연습해 2014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기악과에 수석 입학했으며, 일본 다카마쓰 국제 피아노 콩쿠르와 제네바 국제 콩쿠르 피아노 부문에서 모두 1위를 차지하면서 세계 음악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 2015년 제60회 부조니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한국인 최초로 우승을 차지했다.

현재 국내외적으로 유명한 차인홍 교수는 소아마비로 장애우 후원자였던 바이얼리니스 강민재 선생에게서 무료로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해 연탄광에서 하루 10시간이상 매서운 추위와 싸우며 익힌 연주실력을 바탕으로 뉴욕시립대학교 브루클린대학 석사,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립대학 지휘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또 대전시립교향악단 악장, 사우스 캐롤라이나 필하모닉 바이올린 수석을 역임했고 83대 1의 경쟁을 뚫고 라이트 주립대교수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베네수엘라 국립오케스트라, 러시아 세인트 피터스버그 심포니 오케스트라 등 여러 나라의 오케스트라를 개원지휘하며 바이올린 연주자로 우뚝섰다. 가난과 장애를 가진 한 소년에게 누군가가 나서서 후원했기 때문에 세계적인 연주자가 될 수 있었다.

이제 애틀랜타는 미주 한인커뮤니티 중 LA, 뉴욕에 이어 세번째 큰 커뮤니티로 성장했고, 한인 기업들은 확장일로에 있다. 이제 기업의 이윤을 재능과 실력이 탁월한 2세 문화예술인들을 위해 지원할 때다. 애틀랜타 기업인과 뜻있는 독지가들이 문화예술인 후원협회를 구성하고, 가난하지만 재능있는 2세들을 발굴해 애틀랜타 한인사회의 힘으로 세계적 연주자로 키워보자고 제안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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