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덫 걸려 고문받아도 내 나라니까 목숨 걸었지 …”
독립운동가 이호식 옹
광복절을 앞두고 일제 강점기 조국 독립을 위해 젊음을 바쳤던 이호식(사진·94) 옹을 만났다.
그는 현재 데스플레인 소재 노인 아파트에서 거주하고 있다. 건강이 좋지 않지만 마음만은 청춘이라고 자부한다.
▶낮에는 교사, 밤에는 독립투사
1922년 12월 17일 경기도 장단에서 태어난 이호식 옹은 1945년, 23살의 나이에 이중 생활을 시작했다.
날이 밝을 때는 지역 주민들이 우러러보는 국민학교 교사 도코하라로 생활하며 10~11세 학생들을 인솔했고 밤이 깊어지면 조국을 찾겠다는 일념으로 뜻을 같이하는 청년들과 함께 임시 정부, 독립운동에 관한 정보를 수집했다.
이 옹은 “‘들풀은 밟고 밟아도 다시 살아나고 별빛은 밤이 어두울수록 더욱 빛난다’는 말처럼 일제 강점기에 조국을 되찾고자 하는 사람들이 독립이라는 뜻을 나누며 똘똘 뭉쳤다. 저녁만 되면 독서회에서 청년들과 함께 한국어로 된 책을 읽고 독립 정신을 되새겼다”고 말했다.
▶한국인이 한국인 배신
독서회에 함께한 일부 청년들이 경찰에 잡혀 모진 고문을 받으면서 이 옹을 비롯해 나머지 학생들도 함께 체포됐다. 그리고 이 옹은 갖은 고문과 함께 옥고를 치르게 됐다. 특히 이 옹은 한국인들의 배신으로 받은 상처가 더 크다고 말했다.
이 옹은 “한국 사람들의 움직임을 고발하는 한국인들이 있었다. 우리는 여우, 생쥐들이라 불렀는데 그 사람들에 의해 발각됐다. 1945년 4월 1일 수업 중 형사가 찾아오더니 아이들 앞에서 나에게 쇠고랑을 채워 데려갔다. 집으로 데려가더니 내 방을 다 뒤지고 한국어로 된 서적, 독립운동을 위한 자료들을 모두 가지고 나를 파주 경찰서로 끌고 갔다”고 설명했다.
▶형언 할 수 없는 두 달간의 고문
이어 “두 달 동안 고문당한 건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손가락 사이에 나무를 넣고 손가락을 으스러뜨리기도 했고 소의 실을 말린 거로 때리는 것은 기본이었다. 긴 의자 위에 눕혀서 적신 수건을 입에다 씌운 후 고춧가루를 탄 물을 부으며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즐거워 했다. 사람으로서는 못할 짓을 많이들 했다. 그날만 생각하면 치가 떨려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다”고 덧붙였다.
이 옹은 두 달간 구치소에서 복역한 후 6월 2일 창문을 부수고 탈옥했다. “실패하면 총살을 당할 것을 알았지만 독립운동을 해야한다는 생각뿐이었다”고 설명했다.
▶자유의 소중함 깨달아야
만주로 도망간 그는 독립군들을 만나 독립운동에 다시 가담했다. 그리고 중국으로 길을 떠나려던 중 해방 소식을 들었다.
이 옹은 “그 당시 심정은 말로 할 수가 없다”며 “많은 것을 잃고 또 포기해야했지만 우리 조국을 되찾은 거 하나만으로 모든 것이 보상된다. 세월이 많이 흘러 당시 활동했던 이들은 거의 세상을 등졌다. 그게 너무 아쉽고 또 마음이 아프다”고 아쉬움을 표했다.
젊은 시절, 조국 독립을 위해 희생했던 독립운동가는 마지막 당부를 잊지 않았다.
“나라 잃은 서러움을 아는 이들이 이제 얼마나 있겠냐며 “한국 전쟁 당시에는 나 뿐만 아니라 청년들이 자진 입대하며 나라를 위해 싸웠다. 하지만 요즘 세대들이 독립운동가 그리고 참전용사들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대한민국 독립을 위해 몸을 바쳐 헌신한 이들이 원하는 것은 단 하나, 이 자유가 계속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청년들이 역사 정신과 애국정신을 길러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고 강조했다.
김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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