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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칼럼] 하나님 나라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김요한 목사
순복음반석위에교회
yohankim73@gmail.com

한국의 모 방송국에서 진행하는 길거리 강연 프로그램이 있다. 강연자가 자유주제를 가지고 강연하는 프로그램인데, 한 강연자가 인간의 존재에 관해, 존재 의미에 대해 강연을 하고 있었다. 조금 늦게 도착한 신혼부부가 아기를 안고 맨 앞자리에 가서 앉았다. 강연자는 마침 도착한 아기 때문에 모든 사람의 시선이 환하게 변했다고 말했다. 잠시 후 아기가 ‘응애~’하며 울자 아기 아빠는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가 될까봐 서둘러 아기를 들고 뛰어나갔다. 강연자는 “아이가 운다고 데리고 나가는 그런 몰상식한 짓을 하지 말라”고 다그쳤다. 서둘러 뛰어나갔던 아기 아빠는 다시 냉큼 뛰어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관중들이 박수를 치며 웃고 있을 때, 강연자가 말했다. “지금 순서가 뒤바뀌었습니다. 아이가 우는게 정상이지요. 엄마 아빠만 보고 싶은데 사람들은 많지, 어떤 사람은 시끄럽게 떠들지, 가만히 듣고 있는게 이상한 거예요. 그런데 가만히 있거나 아무것도 안하면 쓸모없다고 평가하는 주변의 모든 소리를 대적하십시요.”

‘안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할 수 없기 때문에 못하는 것’을 이상하게 쳐다보고 수준미달로 판단하는 세상이다. 이젠 아예 대놓고 차별을 한다. 할 수 있는 사람과 할 수 없는 사람, 가진 사람과 못 가진 사람, 실력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등등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조건들로 구분짓고 나누고 차별을 한다.

현대사회는 평등을 외치지만, 출신에 따른 사회적 차별주의는 날로 심해지고 있다. 얼마전 인기리에 종영된 한국의 한 드라마에서 소위 한국의 상류층 사람들의 삶과 상류층에 들어가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의 치열한 삶을 다룬 적이 있었다. 특정계층의 사람들이 사용하는 어법과 태도, 취미 등을 가르치는 장면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그림이 취미가 되고, 골프는 필수, 대화 중에는 낮은 목소리, 사람을 무시하지도 존중하지도 않는 알 수 없는 표정, 동사보다는 명사를 이용해 의미 전달하고, 짧은 대답은 존댓말을 쓰고,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땐 어미를 축약하며, 그리고 반드시 사람의 눈을 바라볼 것. 아무리 돈을 많이 가지고 있어도 이러한 조건을 지키지 않으면 품위가 떨어져 보인다. 이것이 상류층 사람들이 지키는 규율(?)인가보다.

우리가 살고 있는 미국에는 백인 우월주의가 존재하고, 미얀마는 로힝야족에 대한 탄압으로 ‘인종청소’라는 말이 등장했다. 교리적 문제로 종교탄압이 문제가 되는 곳이 있는가 하면, 종교적 신념으로 오직 자신의 신을 위한 테러를 감행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동남아 이주민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세상은 이렇게 인종적, 문화적, 지역적, 신분적으로 차별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는 차별이 없다. 요한계시록에는 초대교회를 향한 예수님의 말씀이 있다. 초대교회들 간에 분명한 차이가 존재하지만, 예수님은 초대교회를 다른 교회들과 비교하며 책망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초대교회 안의 나눔과 분열을 책망하셨다. 사도바울도 그의 서신서에서 초대 교회 안에 있었던 차별과 귀족주의, 권위주의를 철저하게 책망하고 있다. 기독교는 분명 사랑의 종교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제일 큰 계명이고, 이에 못지 않은 계명이 이웃사랑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들의 모습은 어떤 모습인가? 초대교회와 같은 나뉨과 분열이 우리들 교회에 있지는 않은지 항상 살펴야 한다.

요즘 가장 큰 이슈가 되고 있는 동성애 문제. 사회적 이슈이기도 하지만, 교회 안에서도 큰 이슈가 되고 있다. 과연 이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어떻게 대해야 할까? 교회 안에서도 이견들이 많은 것 같다. 하나님의 말씀에 동성애는 분명한 죄악이다. 그러나 주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 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지금의 교회는 ‘동성애자는 교회에 들어올 수 없다’고 선을 긋는 모습이다. 죄의 문제는 스스로 해결하고 교회로 들어오라고 안내하는 듯하다. 이것은 교회 안에 또 다른 차별이 아닐까? 교회가 죄의 행위에 가담할 수는 없겠지만, 죄인을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그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교회 안팎으로 찾고 도와줘야 한다. 영적인 일이든 현실적인 일이든 그들 스스로는 절대 빠져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을까? 더 고민해야 한다. 너무 쉽게 접근하면 오히려 기회를 잃을 수 있다. 문제는 이것이 생각과 말은 쉬운데, 현실적으로 실천하기가 쉽지 않다.

개인적으로 참 좋아하는 성경구절이 있다. 스바냐 3장 17절 말씀이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하나님은 우리 한사람 한사람의 존재 자체를 기뻐하신다. 물론 이 말씀이 죄짓는 존재까지 기뻐하신다는 말씀은 아니다. 죄인들은 불쌍히 여기시며 안타까워 하시나. 자녀들이 아무리 사고치고 다녀도 부모에게는 여전히 그 존재가 귀하다. 강연장의 어린 아기가 ‘응애~’하고 울어도 아기는 존재 자체로 의미가 있다. 존재만으로도 ‘아빠 미소’가 절로 지어진다.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미소다.

우리 개개인은 그런 사람이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 서로 분열과 나뉨이 있는 것은  하나님 나라와 상관이 없다. 성령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나되게 하신다. 하나님 나라에는 차별이 없다. 하나님 보시기에 그저 좋기만한 귀중한 존재들이다.

김요한 목사
순복음반석위에교회 담임목사
순복음세계선교회 북미총회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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