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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칼럼>멍들어 버린 광복절

올해로 69번째 맞이하는 광복절이다. 그런데 올해의 광복절은 일본의 한반도 점령을 미화하는 이런 말 저런 말 때문에 멍이 들었다는 느낌이다. 몇 년 전부터인가 일본이 한반도를 위해 철도를 놔주었다는 식이라든지, 한국의 근대화가 가능했던 것은 일본의 한반도 통치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식의 이야기들이 가끔씩 튀어나오더니, 이제는 아예 노골적으로 일본의 한반도 점령을 미화하는 발언이 자주 등장하고 있다. 그동안에는 워낙 반일 감정이 크다보니 웅크리고 있었다가 이제는 당당히 커밍아웃을 한다. 아마도 자기들의 정체를 드러내도 누가 어쩌지 못할 것이라는 자신감이 생겼나보다.

이런 일제 찬양을 놓고 교회도 후유증을 앓고 있다. 얼마전 공석 중인 국무총리 내정자로 지명되었던 문창극씨가 교회에서 강연한 내용이 불씨가 되었다. 그는 사회에서는 언론인으로, 교회에서는 장로로 한국 사회에 나름대로 영향을 주는 자였기에 국무총리로 내정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강연 중에,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로 살아간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주장을 했었다. 이 내용이 한국 사회에 알려지자 큰 파장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 파장은 기독교회 안에 큰 논쟁을 야기시켰다.

문창국의 식민지 정당화 논리를 반대하는 목회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들어 일본의 침략을 정당화시키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또 다른 목회자들은 동영상을 보고 나니 강연 내용이 그리 크게 잘못 된 것이 없다는 반응이었다. 하나님이 세상 역사의 주관자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일본이 한국을 점령한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본 것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는 바람에, 기독교가 두 부류로 나눠지고 말았다. 특히 보수교회 안에서 일제 침략에 대해 하나님의 뜻을 놓고 논쟁이 일어났다.

그런데 이 논쟁을 놓고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이 생긴다. 문창극의 “하나님의 뜻” 발언에 우리가 묶여버린 것은 아닌가? 사실 ‘하나님의 뜻’에 관한 논쟁은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사이에서 결론이 날 수 없는 끝없는 논쟁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장로교회 안에서도 의견이 갈리고 말았다. 이런 논쟁 속에 휘말리는 교회를 보면서, 어쩌면 우리는 그의 발언에서 막상 문제가 되는 논지를 놓치고서 엉뚱한 것에 서로 얼굴을 붉히고 있지는 않았는지 다시금 성찰해 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렇다면 그가 한 발언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일까? 그가 말하길, 조선 민족은 천성이 게으르고, 있는 자들에게 빌붙는 습성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것을 고치시려고 일본의 식민지로 있게 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가 일제 침략을 본 관점이다. 일제의 침략을 받게 된 원인 제공은 바로 조선의 백성들이라는 말이다. 조선의 백성이 게으르고 힘있는 사람들에게 빌붙는 습성을 고치도록 일본이 그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말이다. 문제는 백성들에게 있다는 것이다.

과연 그의 이 말이 사실인가? 조선의 백성은 과연 게을렀는가? 게을렀다면 왜 그렇게 되었는가? 조선의 백성은 힘있는 사람에게 빌붙는 성향이 있다? 그게 사실인가? 사실이라면 왜 그렇게 되었는가?

아마도 문창극은 조선시대, 특히 조선말기의 역사를 읽어보지 않았는가보다. 당시의 힘있는 자들인 양반들이 서로 무리를 지어 권력 다툼을 하는 가운데,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외세의 힘을 끌어들여 한반도를 전쟁터로 만들어 버렸다는 이 기초적인 사실을 읽어본 적이 없나보다. 거기에다 탐관오리들의 탐욕이 백성들의 땅과 재산을 탈취하여 절망에 빠지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정규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닌가? 백성들이 게으른 것이 아니라 일 할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일해도 모든 것을 빼앗기는 좌절을 경험했던 백성이었다. 그런 그들이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했을까? 결국은 힘있는 자들, 돈이 있는 자들, 자기들의 것을 빼앗은 자들에게 굽신거릴 수 밖에 없지 않았을까?

영국 켐브리지 대학의 경제학 교수인 장하준은 그의 책, <나쁜 사마리아인들> 에서 백성이 게으른 것은 나라가 가난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나라가 백성에게 일자리를 만들어 주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성경은 가난을 얘기할 때에, 개인적인 차원의 게으름 때문에 가난이 따라오는 것을 몇 군데에서만 언급한다. 오히려 구조적인 문제로 오는 가난함에 대한 언급이 거의 전부다. 즉, 가진 자들의 착취와 부패로 인해 오는 가난함을 놓고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꾸짖고 경고하셨고, 그 말씀에 기득권자들이 귀 기우리지 않고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하지 않았기 때문에 온 사회가 붕괴되고 그 결말은 나라의 멸망이었다. 하지만 만약에, 이스라엘의 사회 기반이 견고했었다면 주변 제국이 아무리 강했어도 이스라엘은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이 성경에서 일관되게 주장하는 사실이다.

그런데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게 된 원인이 당시 기득권자들의 권력 다툼에 있었던 것을 일반 백성에게 그 책임을 돌리면서 하나님의 뜻을 내세우는 문창극씨와 같은 자세는 해방 후에도 여전히 일제 시대의 특혜를 누리는 자들과 그 주위에서 혜택을 받은 자들이 내세우는 논리와 동일 할 수 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놓고 논쟁을 벌일 것이 아니라, 잘못된 식민지사관에 대한 치열한 논쟁을 벌였어야 했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멈추고 다음과 같은 질문을 생각해 보자. 교회에서 세상 역사를 논하는 것이 가능한가? 교회는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는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만약에 이 세상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교회가 모르고 있다면 어떻게 세상을 향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 그냥 “예수 믿고 천당 가세요. 예수 믿으면 부자되세요.”식이면 되는가?

또 어떤 이들은 문창극씨가 교회에서 한 얘기를 가지고 왜 그러느냐고 불편해 한다. 이런 사고는 매우 세상 역사를 교회에서 논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과 동일하게 이원론적이다. 교회와 사회는 서로 단절되어 있는 따로따로가 아니다. 교회에서 그가 한 발언은 그가 품고있는 신념이요 세계관이며 가치관이다. 그러면 그가 세상에서 국무총리직을 수행할 때에 자신의 세계관과 가치관과는 다른 어떤 특별한 것을 가지고 직무 수행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절대 불가능하다. 그는 현재 자기의 것으로 일을 할 수 밖에 없다. 만약에 교회에서 한 말이 세상과는 상관이 없다고 한다면, 설교는 왜 필요한가? 설교의 목적은 무엇인가? 결국 설교를 통해 깨달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세상에 나아가서 순종하는 삶을 살기 위한 것이 아닌가!

올해 69번째 맞이하는 광복절은 식민지사관을 가진 지도층에 의해 멍이들어 버렸다. 교회는 사회적 논쟁의 파도를 제대로 넘지 못하고, 엉뚱한 교리 싸움으로 물 속에 가라앉고 말았다. 내년 70번째 올 광복절은 말 그대로 하나님의 진리의 빛이 한국 사회에 제대로 비춰질 수 있기를 기도한다.

나눔교회 안지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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