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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호흡이 가능한 공동체

작년에 “응답하라 1994” 라는 드라마가 케이블 TV를 통해 절찬리에 방영된 적이 있었다. 나의 대학생 시절은 70년대이기 때문에 한참 후의 이야기이지만, 그래도 하숙집을 무대로 각지에서 온 학생들과 주인집 가족들 사이의 애환이 담긴 추억의 이야기들이 담겨있어서 그 당시를 지나온 세대들에게는 추억을 다시 한번 가슴에 담아보는 시간이었던 것 같았다.

그런데 요새 흥미로운 소재를 가지고 방영되는 드라마가 있다. 그 드라마는 “유나의 거리” 인데, 주 무대는 과거 건달 출신인 만복이와 요정 출신인 홍여사 부부의 집에 세들어 사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이다.

여주인공인 유나는 소매치기이고 그와 함께 방을 쓰는 언니 미선이는 유부남을 유혹하는 꽃뱀이다. 옆방에 사는 칠쟁이 칠복이는 마약하는 남편의 폭행에 시달리다 도망친 유부녀와 함께 부부로 살아간다. 아래 문간방에는 주인집 남자가 과거 건달 조직에 있을 때에 큰형님으로 모셨던 일명 “도끼”라는 별명을 가졌던 노인이 혼자서 외롭게 살고 있다. 그리고 옥탑방에는 여주인의 남동생 홍계팔이 살고 있는데 사사건건 누나의 걱정거리가 된다. 이 집에서 기막힌 사연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주인집의 대학 다니는 딸과 초등학생 아들뿐이다. 그나마 이 둘 사이도 엄마가 다른 오누이지간이다. 이들은 서로 상관하지 않고 지낸다. 특히 유나의 직업은 룸메이트인 미선이를 제외하면 다른 사람들에게는 미스테리다.

드라마 속에서 전개되는 이렇게 기막힌 사연이 있는 사람들의 속사정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저들 속에 들어가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내가 16년 동안 파푸아뉴기니의 울창한 숲 속의 원주민들과 함께 생활했던 경험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특이한 사연으로 채워진 셋집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다고 장담할 수가 없다. 이런 환경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면 나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살 수 있을까? 절제되고 거룩한 성직자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모습일까? 자기들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다고 여기는 성직자의 모습이 과연 여기에 어울리기는 할까?



이렇게 각자 다른 사연을 지닌 사람들이 살고 있는 이 집에 어렸을 때 부모를 잃고 혼자서 살아온“창만”이라는 청년이 세들어 오게된다. 주인집이 운영하는 “차차차 콜라텍” 이라고 불리는 카바레에 총지배인으로 들어간 창만이는 고등학교 검정고시에 합격하고서 경찰 공무원이 되기 위해 준비하는 성실한 청년이다. 이 청년은 정말 바른생활의 본이 될 정도로 반듯한 청년이다. 그런데 이 집안에 창만이가 들어오면서, 이전까지는 서로 모른채 지나가고, 마주치게 되면 겨우 인사치레만 했던 사람들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눈에 띄지 않던 창만이는 사람들에 대한 진심어린 마음때문에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이 그에게 마음을 열어가기 시작한다. 전혀 변화할 것 같지 않던 사람들이, 각자 자기들의 주장을 내세우는 바람에 서로 으르렁거리던 사람들이, 그리고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가졌다는 이유로 남을 쉽게 판단해 버리는 사람들이, 이 청년의 넓은 오지랖을 처음에는 귀찮아 하다가 점점 그 매력에 빠져들게 된다.

창만이는 언뜻 보기에는 셋집 사람들과 주변의 사람들과 그리 다를바가 없다. 그들과 한 생활권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그들과 같지 않은 삶의 태도를 보인다. 다른 이들은 자기들이 겪은 과거의 아픔을 오늘의 짐으로 짊어지고 살아간다. 그렇지만 창만이는 그들 못지 않은 아픔을 겪었지만 그 아픔이 자신의 오늘을 옭아매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거기에다, 그는 셋집 식구들이 겪는 오늘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품을 줄 알며, 그 치유를 위해 자신을 내어준다.

창만이에게서 가장 큰 강점은 셋집 식구들의 허다한 문제를 보면서도 그들을 정죄하지 않는 데 있다. 그들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직면하게 하지만, 그들을 비난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이 문제를 풀 수 있도록 함께 호흡을 맞추고 발걸음을 조절한다. 이런 그의 수고 덕분에 셋집 식구들 속에 조그마한 변화가 시작된다. 특히 소매치기 유나는 습관적으로 치솟는 소매치기 충동을 진정시키려 애쓴다.

이 창만이에게서 예수의 형상이 그려진다. 세상이 혐오하고 비난하는 건달 출신, 요정 출신, 꽃뱀 출신, 불륜의 칠쟁이 출신, 부랑아 출신, 소매치기 출신, 부패 형사 출신들은 예수가 사역했던 그 당시 사회에서 죄인으로 낙인찍혔던 자들과 같은 부류의 인간들이다. 예수는 당시 창녀와 세리들과 함께 어울리며 그들의 친구로 살았다. 이런 그분에게 당시 기득권자들은 신랄한 비난을 가했다. 예수는 이렇게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그들에게 희망이 되었고 살아갈 이유가 되었다. 그들과 함께 사는 것때문에 결국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 예수를 저 사회의 낙오자들은 어떤 눈으로 보았을까?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다. 몸이라 함은 사람들이 예수가 누구인지 알고자 할 때에 교회를 보면 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교회는 죽음에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그 때까지 예수의 삶을 살아내야 하는 예수의 화신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사회의 약자들이 찾아올 수 있는 따뜻한 자리여야 한다. 그리고 약자들을 찾아가서 함께 하는 손길이어야 한다. 비록 그들의 말과 행동과 삶의 방식이 어색하게 느껴진다 할지라도, 그 말과 행동과 삶의 방식을 넘어선 그들의 마음을 볼 수 있기를 바라면서... 이렇게 될 때에, 비로소 교회는 생명의 호흡이 가능한 공동체가 되지 않을까?

안지영 목사(나눔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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