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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칼럼> 내 사촌은 공선경

허선영
제1회 텍사스 한인예술공모전 대상 수상자

내 사촌은 공선경.

설마 했던 일이 현실이 된 건 여름방학이 시잘 될 무렵이었다.
반복되던 싸움과 화해 끝에 엄마 아빠는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이혼을 결정하셨다. 물론 나의 생각과 의견을 물어 보지도 않았고, 나도 더 이상 울며불며 떼쓰고 매달리지 않았다. 나는 내 삶에 예상하긴 했지만 느닷없이 찾아온 변화를 쿨하게 인정했기에 절대로 당황하지 않았다. 우습게도 엄마 아빠의 이혼으로 제일 당황한 것은 내가 아닌 나의 사촌 공선경이었다.
여름 방학이 시작되자마자 간단하게 내 짐을 꾸려서 시골 외할머니 댁으로 이사를 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외삼촌 댁, 외사촌 선경이 방으로 내 짐을 옮긴 것이다.
선경이는 나와 같은 6학년이다. 하지만 내 생일이 선경이보다 8개월이나 빨라서 나에게 언니라고 불러야 하는 태어날 때부터 어찌 보면 나를 싫어 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 났다는 생각이 든다. 어릴 적부터 나에게 언니라고 하지 않는다며 외할머니와 외삼촌에게 매일 꾸중을 들으면서도 13년 동안이나 꿋꿋이 나에게 ‘민지야’ 나 ‘야!’ 라고 부르는걸 보면 사극에서 나오는 대쪽 같은 성격임이 틀림이 없다. 난 이제부터 대쪽 선경이와 한방을 쓰게 되었다.

나는 짐을 옮기던 날의 선경이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6학년이 된 기념과 나의 첫 생리를 시작한 것을 축하하는 의미로 모조리 새 가구로 바꾼 지 넉 달 밖에 안 된, 나의 탁월한 안목이 선택한 깔끔하고 세련된 침대와 옷장, 책상 등이 마구마구 날라져 들어오기 때문이다. 마치 동화 속 신데렐라가 호박이 황금 마차로 바뀌는 것을 보는 것같이 입을 벌리고 눈이 땡그래져서 마법처럼 바뀌고 있는 자기의 방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다물어 지지 않은 선경이의 입을 보면서 피식 미소가 돌면서 눈물도 같이 돌았다. 정리해서 말하자면 이 가구들은 내가 6학년의 생일 선물도, 생리를 해서 축하를 받은 것도 아닌, 엄마 아빠가 마지막으로 이혼만은 하지말자며 최선을 다해보려고 애써 노력했었던 결과물들이기 때문이다.
예상했던 대로 엄마는 할머니, 외삼촌, 그리고 외숙모와 장장 3시간 동안의 대화 끝에 눈물 바람을 하고 나를 잘 부탁한다는 인사를 남기고 어깨를 들썩이며 서울로 향했다. 왜 어른들은 내 예상을 벗어나질 못하는 것일까? 씩씩하게 서로를 위해 웃으며 헤어질 순 없는 걸까? 엄마가 나를 안고 마르지 않은 눈물샘의 눈물을 퍼 올리기 전에 ‘엄마 잘가.’ 라는 짧은 인사를 하고 얼른 엄마 품을 벗어나서 내 방으로 들어와 버렸다.
예상 못했던 눈물이 툭 떨어졌다. 역시 난 엄마의 딸이라는 싱거운 생각을 하면서 더 이상 떨어지지 말라는 마침표를 하듯 눈물을 주먹 도장으로 꾹 찍었다.
내 방이 어색했다. 정확하게 반을 경계로 선경이의 오래되고 짝이 안 맞는 가구들과 이제 4개월 밖에 안 된 나의 새 가구들이 서로를 경계하듯 마주 보고 있었다. 사극에서 나오는 별당 아가씨와 몸종 간난이 방을 한 공간에 둔 것 같았다. 내 시선이 책상과 옷장을 지나서 침대로 닿았을 때 나를 몸종을 보듯 팔짱을 끼고 새침하게 앉아 있는 선경이를 보았다. 경계하듯 마주보고 있던 것은 가구들이 아닌 선경이와 나였다.

다행이 모두들 나에게 잘 해주었다. 이제 막 일학년이 된 선주는 제 친 언니보다도 내가 더 좋은 듯 했다. 아니 내 옷과 머리핀 그리고 아기자기한 학용품들이 더 좋은 것 같았다. 선경이가 심부름이라도 시킬라치면 요리 뺀질 조리 뺀질 도망 다니기 일쑤면서 나의 사소한 부탁은 언제나 생글생글 웃으며 들어 주었다. 덕분에 선경이가 나를 싫어할 이유가 하나 더 추가되었다. 그래서 가끔은 선경이의 말을 잘 들으라며 내가 동생 선주를 머리핀과 손가방으로 사주할 때도 있었다.
선경이의 말을 빌리자면, 나로 인해 변한 건 철없는 선주만이 아닌 듯 했다. 토요일이면 밀린 잠을 주무시느라 외숙모와 싸우던 외삼촌도 내가 온 이후에는 꼬박꼬박 교외 나들이를 간다는 것이다. 2시간이나 떨어져 있는 동물원, 포도농장 체험, 해수욕장, 그리고 계곡 등등, 매일 금요일마다 저녁을 먹으면서 내일 가보고 싶은 곳을 묻는 외삼촌에게 가끔씩 선경이가 원하는 답을 해주는 것으로 내가 이 집에 함께 살아서 좋은 이유에 하나씩 보탬이 되곤 했다. 외삼촌의 변화는 일주일에 하루지만, 외숙모는 유감스럽게 매일 변화했다. 나물과 생선 위주의 반찬에서 고기와 햄, 그리고 잔치 음식까지... 외할머니는 가끔 눈살을 찌푸리셨지만 우리 셋 꼬마들은 진정한 식탐이 뭔지 보여주마하는 기세로 매일 저녁 식탁 앞에서 전투를 하듯 먹어치웠다. 우리들의 먹는 즐거움이 커질수록 외숙모는 부엌에서 더 많은 시간을 씨름해야했지만 나로 인해 가족 모두에게 좋은 일이니 따로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외할머니의 변화는 온 가족을 힘들게 했다. 사소한 것부터 큰 것까지 동생 선주도 아닌 내 편만 들어서 가끔씩 내가 쌓은 공든 탑을 무너뜨렸다.

한번은 피자 한 조각 때문에 엄마가 서울에서 한걸음에 달려와야 했다.
언제 적 피자였는지 모르겠다. 가끔 주말이면 피자를 시켜 먹었으니까... 아마도 할머니 몫의 피자를 비닐에 싸서 냉동실 한편에 둔 것일 것이다. 마침 외숙모가 자리를 비운 어느 날 오후, 출출했던 동생 선주가 냉동실을 뒤지다 피자를 발견했다. 그리고 피자 한조각의 설렘을 느끼기도 전에 언니 선경이에게 들겼고 어리석게도 사이좋게 나눠 먹었으면 좋았을 것을 서로 먹겠다고 실랑이를 벌이다 할머니에게 들키고 말았다.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할머니는 언니 선경이에게 양보를 강요했고 동생 선주는 승리의 미소를 날리며 전자랜지에 데워진 김이 모락모락 나는 피자 앞에서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나의 등장이 선주의 웃음을 울음으로 바꾸게 될 줄 알았다면 난 결코 피자 냄새 따위에 홀려서 부엌으로 가지 않았을 것이다. ‘와 피자 냄새, 맛있겠다.’ 이게 내가 무심코 내뱉은 딱 두 마디였다. 할머니는 내 말이 끝나자마자 선주가 한 입 물기도 전에 피자를 내 코앞으로 가져왔다. 한참 크는 언니니까 언니가 먹어야 된다는 것이다. 선경에게는 언니니까 동생한테 양보를 해야 하고, 선주는 언니인 나에게 양보를 해야 하고, 누가 봐도 앞뒤가 안 맞는 말이었지만 할머니는 막무가내였다. 내가 괜찮다며 선주에게 피자를 주어도 다시 뺏어서 내 앞에 갖다 놓았고, 그렇다면 셋이 똑 같이 나눠 먹자고 해도 굳이 나에게만 먹으라는 것이다. 사극에서 대사 한마디가 떠올랐다. 성은이 만극하옵니다. 전하! 명을을 거두어주시옵소서! 전하의 하늘같으신 은혜에 소인 몸 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이런 쓸모없는 생각이 스쳐 가는 중에 선주가 할머니 왜 민지언니만 먹으라고 하냐며 울먹였다. 할머니께서도 이런 상황이 사리에 맞지 않다는 것을 알았지만 고모가 사 준 피자라며 둘러대었다. 진정한 문제는 여기서 부터였다. 선경이가 할머니를 쏘아보며 앞으론 민지도 울 엄마가 해준 밥도 먹지 말고, 엄마가 빨래 해준 옷도 입지 말고, 우리 집에 있지도 말라며 바락바락 대들었다. 급기야 할머니께서 손바닥으로 선경이의 등짝을 몇 번 때리다가 내 촉촉한 눈과 마주치더니 이성을 잃고 계란 프라이를 뒤집는 뒤집개를 들고 선경이를 몇 번을 뒤집어버렸다. 전하! 차라리 소인을 죽여주시옵소서! 난 선경이가 엄마나 집을 들먹거린다고 쉽게 상처를 받을 만큼 철이 없진 않았다. 그냥 이런 상황이 싫어서 부엌을 빠져 나가려는 순간, 마루에 장승처럼 서 있는 외숙모를 보았다. 지금까지 그렇게 무서운 외숙모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뒤집개를 들고 멈칫하는 할머니의 당황하는 모습도 본 적이 없었다.
얼굴이 홀쭉해진 엄마는 죄인이었다. 외숙모를 붙잡고 엎드려 빌고 또 빌었다. 유배를 가라면 가고, 사약을 받으라면 받겠으니 내 딸 민지만은 내치지 말아달라고 통사정했다. 나는 깨달았다. 이 집의 왕은 할머니도 외삼촌도 아닌 외숙모였다는걸...
퇴근하고 왕복 10시간 넘게 운전을 하고 잠 한 숨 못자고 다시 출근한 딸이 측은해서 또 다시 이런 사단을 만들지 않겠다고 다짐한 할머니는 많이 조심하는 듯 보였지만 차츰 정리된 우리들만의 화합과 질서는 할머니의 나를 향한 객관적이지 못한 편애 때문에 가끔씩 위태로웠다.

선경이는 생각보다 훨씬 괜찮은 아이였다.
개학을 하고 처음 학교에 갔을 때 선경이는 고모부는 미국에 공부하러 가시고, 고모는 서울 좋은 직장을 다니며 너무 바빠서 할 수 없이 선경이랑 당분간 같이 살게 됐다며 사촌인 나를 친구들에게 소개 시켰다. 당분간이란 말이 맘에 걸렸지만 선경이의 거짓말이 오히려 고맙기까지 했다. 어릴 적 방학 때나 명절에 선경이와 선주타령을 하며 보고 싶어 안달했던 내가 외숙모 집으로 이사를 하고 나서는 왜 그렇게 선경이와 자존심 싸움을 했는지 모를 일이다. 우리는 통하는 것이 많았다. 같은 가수를 좋아했고, 옷 입는 취향도 같았으며, 심지어 생리를 시작하는 날짜도 비슷했다. 이제 선주를 귀찮아하는 것까지 시간이 지나면서 닮아가고 있었다. 내 머리핀과 옷을 얻을 만큼 얻은 선주는 더 이상 나에게 친절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선경이와 내가 더 친해져버리자 배신감을 느끼며 할머니의 품을 더욱 파고들었다.
그리고 모든 것은 다시 조금씩 변화하고 있었다.
외삼촌은 외숙모의 잔소리에도 꿋꿋이 주말에 늦잠을 주무셨고, 외숙모도 몇 시간씩 부엌에서 수고를 하지 않았다. 그래도 솔직히 엄마의 음식 솜씨 보단 훨씬 나아서 난 별 불만이 없었지만 오히려 변화에 불만이 생긴 건 선경이었다. 가끔씩 반찬 투정에 뒤집개로 외숙모에게 한 번씩 뒤집힐 때가 있었다. 내가 가장 맘에 드는 변화는 할머니의 변화였다. 이젠 더 이상 나를 편애하지 않았고, 동생 선주만을 감싸고돌았다.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면서 양보를 강요할 때는 억울하기도 하지만, 차라리 내가 편애를 받는 것 보단 백배 더 맘은 홀가분했다.

방금 비가 그쳐 질퍽한 마당에 일 톤 트럭이 선명한 타이어 자국을 내며 들어와 마루 앞에 멈춰 섰다. 선경이의 13번째 생일 선물로 엄마가 나와 똑 같은 가구를 선물해준 것이다. 여름에 내 가구가 들여진 후 선경이는 종종 외숙모와 외삼촌에게 낡은 가구를 바꿔달라고 졸랐지만 이렇다 할 대답이 없어서 요즘엔 선경이도 포기한 듯 보였다. 가구 때문에 기분이 나쁜 날에는 내 책상과 침대를 하루쯤 양보하기도 했지만 불편하고 미안한 맘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엄마의 뜻밖의 선물에 선경이 보다도 내가 더 기분이 좋았다. 이삿짐 차가 타이어 발자국을 따라 마당을 빠져 나가고 나는 방문을 열어 보았다. 사극에서 나오는 별당 아가씨와 몸종 간난이 방을 한 공간 안에 둔 것 같은 어색함은 사라지고 쌍둥이처럼 똑같은 침대와 책상 그리고 옷장이 날 웃음 짓게 했다. 내 시선이 책상과 옷장을 지나, 침대로 닿았을 때 침대에서 팔짱을 끼고 피식 웃는 선경이를 보았다. 하나처럼 마주보고 있던 것은 가구들이 아닌 어느덧 하나가 되어버린 선경이와 나였다.

허선영
제1회 텍사스 한인예술공모전 대상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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