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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칼럼>마음의 돌

제1회 텍사스 한인예술공모전 우수상 수상자
정신심리클리닉 원장
정평수/수필가

뉴스를 보다 보면 재판장의 모습이 자주 보인다.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왜 이리도 많은지 참으로 험하다. 법 없이 살 수 있는 좋은 세상은 언제 올까 간절히 기다려본다. 배심원으로 재판에 참여했던 생각이 났다. 법원에서 배심원으로 나오라는 소환장을 받고 적힌 날짜에 가보니 강당에는 수백 명의 사람으로 빼곡히 차 있었다. 서로 모르는 사람이다 보니 옆 사람과 말을 섞기도 그렇고 그저 두리번거리며 시간이 되길 기다렸다.

오전 9시가 되자 법원 관계자들이 배심원을 선정하는 절차를 밟았다. 배심원 임무를 수행할 수 없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 사람, 소송 당사자와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 양쪽 검사나 변호사가 각각 불리하다고 생각되는 사람, 피고인과 같은 문제로 형을 살았거나
편견을 가진 사람 등 질문을 통해 배심원 자격이 되지 않는 사람을 가려내는 것이다. 한 사람씩 강당을 떠나더니 결국 나를 포함한 12명만 남게 되었다. 아침 법원에 갈 때만 해도 배심원으로 선발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어떤 수를 쓰더라도 빠져나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간지라 오후 환자들의 스케줄이 그대로 잡혀 있는 상태였다. 배심원에 선정되자마자 문자를 보내 예약을 취소했다. 300여 명에서 12명을 뽑는 배심원으로 선정된 것은 처음이어서 잠깐 좋기도 했지만 일 걱정에 밀려 사라졌다.

12명은 관계자의 인솔하에 재판장으로 들어가 배심원 자리에 앉았다. 판사의 개략적인 설명으로 재판이 시작되었다. 피고인은 20대 중반의 히스패닉 청년이었다. 마약제조, 판매, 소지 등으로 이미 3번의 중범죄를 지어 감옥에 다녀온 전과가 있었다. 이번이 네 번째 재판이어서 조금이나마 유리한 결과를 끌어내기 위해 배심원 재판을 신청한 것이다. 피고인은 헤로인을 판매 소지하는 양이 200g가 넘었기 때문에 1급 중범죄 혐의를 받은 상태였다. 재판에는 텍사스 주 검사와 카운티 검사가 참여하였다. 피고인 측 변호사도 3명이나 되었고, 재판에 관련된 증인들도 많았다. 가족들과 지인들도 참석하여 법정 안은 열기로 가득했다. 배심원들의 생각은 피고인에게 관대할 수가 없었다. 마약으로 일급 중범죄만 4번째 재판이기도 하지만, 매춘, 불법 총기 소지, 그리고 아동학대도 함께 기소 되었기 때문이었다. 오후 늦게 재판이 끝났다. 판사는 내일 아침 8시 반에 다시 속개하겠다고 하였다. 첫날도 둘째 날도 마음은 클리닉에 가 있었다. 법원에 갈 때부터 조바심이 생겼고 클리닉을 비우면 문제가 많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재판은 월요일 시작하여 금요일 오후 늦게야 끝났다. 닷새간 비웠고 일을 못 했지만 염려했던 것과 달리 별일이 없이 지나갔다.



이기적인 사람은 자기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자기 문제에만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남의 인생보다 자기의 인생이 더 힘들고 고통스럽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자기가 하기 싫어하는 일들을 누군가 대신해 주기를 바랄 때도 있다. 그러나 알고 보면 타인의 인생도 내 인생 못지않게 힘들고 고달프다. 내 문제는 직접 추스르고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더 힘들게 느껴지고, 타인의 문제는 그 사람의 문제이기 때문에 쉽게 간과해 버릴 뿐이다. 나도 그랬다.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만큼 바빴고,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사실 시간을 내는 것도 다 마음 씀에 달린 건데 나 역시 그런 데는 인색했다. 쉬는 시간에 다른 배심원들에게 바쁘지 않냐고 물어보았다. 바쁘지만, 배심원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의무이고 누군가 해야 할 일이기 때문에 괜찮다고 했다. 그들은 나보다 넉넉한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있었다. 갑자기 내가 작아지는 것 같았다. 배심원으로 참석하여 시간이 흘러갈수록 환자를 떠나 나 자신을 돌아보고 만나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다. 나 아니면 안 된다고 바둥거리며 산 세월이 나를 안아주었다.

돌아보니 나는 가끔 아이들에게 잘못된 것을 가르친 아빠였다. 미국에서 교육을 받고 자란 아이들은 모든 걸 정석으로만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답답해 보였다. 재판을 받아야 할 만큼 큰 잘못은 아니지만, 나의 그릇된 행동은 아이들의 마음에 적잖은 상처를 주고 어른으로서 본이 되어주지 못했을 것이다. 일 테면 시간이 촉박한 데 대충 두고 오라 해도 쇼핑 카트를 꼭 제자리에 갖다 놓고 온다든지 하는 따위의 일이 그랬다. 아이들이 옳은 행동을 하고 있는데 기다리거나 참아주지 못하고 감정적으로 재촉하거나 채근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빨리빨리 성과 위주로 교육받고 살아온 나의 조바심이 아이들을 불편하게 하고 안달복달하는 성격이 잘못된 행동을 강요한 것이다. 그런 아버지의 행동이 얼마나 싫었을까 생각하니 부끄러웠다. 하나라도 더 얻고 손해 보지 않으려는 마음에서 비롯 되었을 것이다. 그런 것들이 결국 편협한 생각으로 인도하지 않았나 싶다. 바쁜 걸음을 멈추니 나의 부족함이 보였다. 평생을 배웠는데 아직도 고칠 게 많다. 안달복달하던 마음을 내려놓으니 한결 가볍다. 그 무거운 돌 하나 내려놓는데 오십 년이 넘게 걸렸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마음의 돌을 내려놓아야 가벼워지는 걸까 자신을 재판해본다. 조금 열었을 뿐인데 숨통이 트인다. 열린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는 바람, 어제의 그 바람이 아니다.

제1회 텍사스 한인예술공모전 우수상 수상자
정신심리클리닉 원장
정평수/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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