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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칼럼> 숨은 기억 찾기

허선영
제1회 텍사스 한인예술공모전 대상 수상자

사람이 기억하는 에피소드들은 얼마나 될까? 40년이 넘는 세월을 살면서 쌓아만 두었던 특별하지 않고 그날이 그날 같은, 혹은 잊기 힘들 것 같은 특별한 기억들이 얼마나 되는지 궁금하다. 기억을 붙잡는 것에는 일기만큼 좋은 것이 없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지만 일기쓰기를 습관으로 만드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나 또한 스스로 자부하던 일기 쓰는 습관을 끊은 지 오래니까...

초등학교 때에는 방학 숙제로 일기를 썼고, 중학교 때부터는 친구 재연이가 선물해 준 일기장에 Pretty Friend의 약자로 Pran이라고 이름을 지어서 대화하듯 써내려 간 것이 진정한 나의 속마음과 대면하게 된, 일기쓰기의 시작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참, 이름이 웃기다.) Pran이 한권이 되고 두권이 되고 세권이 되고, 나는 점점 자라서 고등학교를 지나 대학을 가고 그리고 사회인을 지칭하는 가장 근사한 표현인, 어엿한 직장인이 되어서도 계속 Pran과 함께했다. 방학이 되어 하숙집을 옮기거나 직장을 얻고, 또 결혼을 해서 신혼집에 이사를 하면서도 가장 먼저 챙기는 것이 Pran일만큼 애지중지 했지만 미국살이를 시작하며 쓰던 세간들과 함께 친정에 맡겨놓고 열권 가까이 되는 Pran을 궁금해하기만 했다.

몇 년 전이었다. 늙어서는 아파트 생활이 최고라며 전원주택을 처분하고 아파트로 이사한 부모님은 아쉽게도 나의 오랜 Pran을 기억하지 못했다. 엄마는 작년에 담군 된장과 간장이 낡아 빠진 상자에 담긴 잡동사니보다 백배는 더 중요할테지... 집이 좁아지는 바람이 간장독과 된장독을 걱정하는 엄마에게 프랜인지 머시기인지는 전혀 안중에 없었다. 아니, 소리를 지르며 박스 찾아내라고 울먹거리는 마흔을 넘긴 딸이 아직도 철딱서니 없는 자식 새끼중에 한명이었을 것이다. 참으로 싱겁게 나의 Pran은 사라져버렸다. 나의 중학시절부터 결혼 전에 이르기까지의 구구절절, 시시콜콜, 캐캐묵은 이야기들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방법으로 사라져버렸다. 차라리 모닥불에 한 장씩 찢어서 던지며 근엄한 장례식이라도 치러줬으면 좋았을텐데... 엄마를 원망하기엔, 실은 오랜 친구를 방치한 내 잘못이 컸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며칠 전에 친구 재연이를 만났다. 오랜 친구와 오랜만에 만나서 쏟아지는 수다를 떠는 것 보다 우리를 조금씩 닮은 아이들이 함께 조잘거리며 노는 모습을 보는 것은 또 다른 행복함이었다. 저녁을 배불리 먹고 배를 두드리며 수박을 먹고 있을때 재연이가 장롱 속에서 낡은 신발박스를 들고 나왔다. 재연이가 모아놓은 초등학교때부터 대학때까지 받은 편지들이었다. 오마이갓! 편지 몇 개를 걷어내자 눈에 익은 편지봉투가 눈에 들어왔다. 정말이지 오마이갓이었다. 탄성을 연발 내지르며 내가 재연이에게 썻던 스무개 남짓 되는 편지들을 하나하나 읽어 보았다. 공부시험공부시험, 지겨운 학창시절을 토로하는 내용부터, 나도 잘 못하면서 재연이를 위로하는 유치한 격려와 심지어 얼굴조차 기억이 안나는 친구의 뒷담화와 결정적으로 자지러지게 웃으며 뒤로 까무러친 것은 지금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A라는 남자친구가 좋다고 재연이에게만 비밀고백을 한 것이었다. 그 시절의 나는 시쳇말로 금사빠(금방 사랑에 빠지는 사람)였다.



편지 봉투만 보고도 ‘아하!’하며 떠오르는 기억과 생각해내려 애를 써도 기억 한 가닥 잡히지 않는, 정말 기억이라고 해도 되나 싶은 기억조각들을 대하며 닭살 돋기도 했지만 반면으로는 걱정스럽기도 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얼마나 좋은 숨은 기억들을 가지고 있을까? 나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어떤 사람일까? 예상치 못한 친구 재연이의 보물 상자를 하나하나 열어보며 배꼽 빠지게 웃고, 그땐 그랬지하며 고개를 끄덕이면서 얼굴이 빨개졌다. 지난 시절의 내가 마흔이 넘은 지금의 나를 만나며 서로에게 부끄럽지 않기를, 수박을 자르는 친구 재연이와 젠가 게임을 하고 놀고 있는 아이들을 보며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행복한 이 시간이 꽁꽁 숨어버리지 않는 ‘아하!’하며 툭 튀어나오는 기억이 되길 고대한다.

허선영
제1회 텍사스 한인예술공모전 대상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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