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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칼럼] 편애하지 않기

허선영
제1회 텍사스 한인예술공모전 대상 수상자

초등학교 다닐 때 시골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유난히 뽀얀 피부를 가지고 오목조목 정말 예쁘게 생긴 친구가 있었다. 양볼에 옴폭 들어가는 보조개의 매력은 덤으로 공부까지 잘하는 친구A는 해가 바뀔 때마다 담임선생님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시커먼 얼굴에 바가지 머리를 한 나야 뭐, 그러거나 말거나, 치마 한가득 돌멩이 주워 담아서 공기놀이하기 바빴고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 이천 봉, 볼수록 아름답고 신기하구나!’하며 고무줄 놀이할 시간도 부족했기에 정작 A만 유심히 관찰 할 짬도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가끔씩 A를 흘기며 재수 없어 하거나 쑥덕거리는 친구들과 함께 있으면 왠지 모르게 A가 싫어지는 날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A가 집으로 찾아와서 보라색 원피스에 눈물콧물을 흘리며 펑펑 울며 하소연을 했다.
“선영아, 내가 뭘 잘못했니? 선생님이 시키니까 교무실 왔다갔다하며 심부름 하는 건데, 나도 정말 싫은데... 그렇다고 자꾸 나만 시키는데 대놓고 싫어요, 하냐? 그리고 내가 또 뭘 그리 이쁜척을 한다며 난리야. 난 그냥 애들이 째려보니까 무안해서 살짝 웃었고, 혼자 심심하면 먼 산보다가 가끔 책 읽는 게 단데, 웃으면 보조개 자랑할려고 이쁘게 보일려고 여시짓한다그러고, 먼 산보고 넋 놓고 있으면 새침하다, 도도하다 그러고 책 읽고 있으면 선생님 한테 잘보일라고 그런다그러고,,, 흑흑,, 내가 뭘 잘못했니?”
그때가 6학년 때였다. 그 당시에는 사춘기는 오춘기의 동생쯤으로 여기며 별 다른 의미를 두지 않았지만 아마도 사춘기가 접어들락말락할 민감한 시기였을 것이다. 중학교에 가고 나서야 윤리 시간에 배운 질풍노도의 시기라는 명제를 달고 있는 사춘기의 초입에서 친구 A가 겪었을 혼란과 자존감의 상처가 지금까지도 가끔 떠오르곤 한다.

같은 뱃속에서 태어나도 열이면 열, 제각각 다 다르다. 심지어 일란성 쌍둥이도 타고난 성향이 다르다. 다르다는 것은 좀 더 나은 것도 있다는 말이기도 하고 좀 더 쳐지는 것도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또는 좀 더 맘에 들거나 좀 더 맘에 들지 않는 것도 있다는 말일테다.
‘열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 없다.’라는 말이 있다. 글쎄, 이 말에는 다소 설정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요지가 있다. 만약에 깨무는 강도를 달리한다면? 혹은, 벌써 다친 손가락을 또 깨문다면? 그리고 정확히 짚어보면 안 아픈 손가락은 없다고 했지 병원에서 설문 조사하듯 아픔의 강도를 1부터 10이라고 했을 때 체크해야 하는 아픔에 대한 레벨은 없다. 난 부모들이 자식 키우면서 편애하지 않는다는 가정으로 매번 차용되는 저 문장이 싫다. 그래서 좀 더 조심을 하려 노력하지만 가끔씩 뜻대로 안될 때도 있다.
아이들 셋이 조르륵,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집안도 깨끗하게 정리해놓고, 맛난 빵을 구워식탁에 올려 놓고 학교에서 돌아오는 아이들을 반가운 얼굴로 맞았다. 다녀왔습니다! 라며 합창하는 아이들을 보며, 큰딸 왔어? 아들 왔어? 하고 어깨를 토닥여주고 마지막으로 들어오는 막내에게는 울 막둥이 왔어? 하며 꼭 안아주었다.
“엄마는 나는 안 안아주고. 언제 안아줬는지 기억도 안나네.”


시니어 큰딸이 무심하게 한마디 했다. 뭐, 아들은 그러거나 말거나 가방을 던져놓고 손도 안 씻고 식탁에 앉아서 빵을 먹고 있었지만...
“야, 너는 다 컸고, 동생은 아직 애기잖아. 시니어가 엘리3학년을 질투하면 되냐?”
괜한 질투라며 한소리 했지만 얼굴 표정은 미안함과 무안함을 그대로 드러냈다.
큰딸이 내 표정을 읽었는지 덤덤하게 한마디 보탰다.
“뭐, 그냥 그렇다고. 근데, 나는 다 컸지만 아직 엄마 딸이잖아.”
“그렇지! 내가 깜빡했네. 울 큰딸도 함 안아주까?”
하며 달려드는 나를 딸은 씩 웃으며 받아주었다.
까맣게 잊고 있었다. 칠순이 된 자식도 아흔의 부모 앞에서는 아기라는 것을.
큰딸은 9년 먼저 태어났을 뿐이고, 막내는 9년 늦게 태어났을 뿐 모두 평등한 나의 자식이다. 덩치랑 나이만 생각하며 의젓함을 강요하다 큰딸에게 어리광 부리는 것을 잊게 하지는 않았는지 혹시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스스로 편애당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반면에 억울할 때도 있다. 나는 공평하게 해준다고 했는데 애들 셋이 입을 모아 편애 당했다는 불만을 쏟아낼 때는 정말이지 그런 게 아니라며 구구절절 설명을 하다가도 에잇, 하고 가슴에 달린 ‘부모’라는 명찰을 떼어내서 바닥에 던져 버리고 싶을 때도 있다.

“내가 뭘 잘못했니?”
가끔씩 친구 A의 울먹거리는 목소리가 들릴 때가 있다. 잘못이 없다고 해도 가끔은 상황이, 설정이, 배경이, 입장이 그렇게 억울하게 만들 때가 있다. 아마 친구들도 알았을 것이다. A는 딱히 잘못한 게 없지만, 선생님이 하는 편애가 질투가 났을 뿐이고 그 질투의 화살을 A에게 쏟아낸 것일 뿐이라는 것을...
난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자식들 셋이 서로 질투의 화살을 쏟아내며 우애가 상하길 바라지 않는다. 그렇기에 항상 편중되게 사랑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는 있는데...
아! 사랑... 참, 어렵다.

허선영
제1회 텍사스 한인예술공모전 대상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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