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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칼럼> 민들레를 응원하며

정란숙
2017년 텍사스 중앙일보 한인 예술대전
문학부문 우수상

어제보다 초록이 한층 짙어진 잔디가 바람에 찰랑거리며 잔잔한 물결을 이룬다. 그 위로 하얀 솜털 같은 민들레 씨앗들이 춤추듯 가볍게 흩날리는 풍경이 한 폭의 수채화 같다. 올해는 예년보다 조금 늦게 묵은 잔디를 깎았다. 너무 늦으면 새 잔디가 자라는 데 지장을 줄 수 있다는 정원사의 말이 신경 쓰였는데, 염려와는 달리 배냇머리를 깎은 아기의 머리카락처럼 하루가 다르게 잘 자라주니 고마울 따름이다. 절기상으로는 입춘이 지났지만, 겨울은 봄에게 자리를 내어 줄 생각이 없는지 추운 날이 계속되었다. 이따금 한 번씩 따뜻한 날이 찾아오기도 했지만, 나무들의 겨울잠을 깨우진 못했다. 잔디밭 가장자리와 돌계단 사이에 언제부터 있었는지 노란색 민들레가 피어 있었다. 어둡고 차가운 땅속에서 겨울을 견뎌내고 가장 먼저 일어나 봄이 왔다고 알려주는 모습이 반가워 그 앞에 쪼그려 앉았다. 제법 쌀쌀한 바람에 흔들리는 맑고 노란 꽃잎이 눈부시게 예뻤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작은 벌들이 꿀을 찾느라 부지런히 날갯짓을 하는 꽃 속에서 수많은 암술과 수술이 씨가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민들레 씨앗들이 바람을 타고 제 갈 길로 떠날 때까지 우리부부도 잔디를 깎는 것을 늦추며 기다려주었다.

똥개도 자기 집 앞에서 싸울 때는 오십 점 따고 들어간다는 말의 의미를 미국에 이민 왔던 첫해 절절히 공감했다. 그해 겨울은 춥고 길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어디든 갈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거라고 자신만만했던 용기는 임신과 동시에 시작된 입덧으로 인해 사라졌다. 호르몬 변화 때문인지, 아니면 나고 자라 28년간 살아온 고국에 대한 그리움 때문인지, 여기서는 구할 수도 없고 언제 먹었는지 기억조차 희미한 추억 속 음식들만 먹고 싶었다. 옆에서 보기가 안쓰러웠던 남편과 시부모님은 입덧이 가라앉을 때까지만이라도 친정에 다녀오라고 배려해 주셨지만, 장시간 비행기를 타는 것이 두려워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되자 입덧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음식에 대한 입덧이 멎자 그제야 보이는 낯선 나라와 익숙지 않은 환경, 그리고 모국어를 쓸 수 없는 것에 대한 마음의 입덧이 시작되었다. 온 가족이 더할 나위 없이 잘해 주는데도 불구하고 사소한 추억들은 그리움이 되어 수시로 외딴섬 같은 외로움 속에 갇히곤 했다. 초등학교 국어책에 나오는 키다리 아저씨네 집처럼 겨울이 가고 봄이 왔지만 다름이 주는 낯섦 때문인지 마음은 여전히 겨울이었다.

그런 향수를 달래주었던 것 중 하나가 한국에서 오는 편지였다.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하지도 않았고, 시차가 달라 통화하는 것조차 어려웠던 시대에 편지는 외로움을 적셔주는 오아시스였다. 오가는 게 느리긴 해도 보낸 이의 마음이 고스란히 품에 안겨 큰 위로가 되었던 편지를 나는 매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그날도 오늘처럼 우편물을 가지러 나갔다가 우연히 우체통 아래 피어 있는 민들레를 보았다. 어릴 적 고향에서 보았던 꽃을 만나니 얼마나 반갑던지, 마치 흉허물없이 지낸 고향친구를 보는 듯했다. 낯설고 먼 이곳까지 날아와 당당히 꽃을 피워 낸 모습이 장하고 기특해 보였다. 사람은 때로 작고 사소한 것에 위로 받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람이 데려다 준 낯선 땅에서 불평하지 않고 꽃을 피워낸 민들레 덕분에 길었던 나의 겨울과 마음의 입덧은 사라지고, 미국에서의 첫봄이 희망으로 시작되었다.

개구리 뛰는 방향과 텍사스 봄 날씨는 아무도 예측할 수가 없다더니 일기예보에도 없었던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한적한 휴일 오후에 내리는 비는 봄이 보낸 선물 같았다. 창문을 열고 비 냄새를 맡으며 두 손으로 빗물을 받아 보았다. 비가 대지와 만나 생명이 있는 것들을 깨워 자라게 하듯 빗물은 손끝을 타고 가슴으로 스며들어 옛 추억을 떠올려 주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부모님과의 추억보다 큰엄마와의 추억이 더 많다. 유교적 가치관이 강하고 안동 김씨 가문임을 중요하게 여겼던 할아버지에게 병약했던 큰엄마는 탐탐치 않은 맏며느리였다. 그래서 집안의 대소사는 손아래 동서들의 몫이었다. 엄마를 따라 큰집에 자주 드나들었던 나는 큰엄마와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큰엄마는 유난히 꽃을 좋아했다. 넓고 큰집 마당 가장자리에는 담장을 따라 긴 꽃밭이 있었다. 봄에는 한해살이 꽃들이 피었고, 여름에는 담장 바깥쪽으로 키가 큰 해바라기들이 장관을 이루었다. 햇살이 한층 노릇해지고 바람이 부드러워질 무렵이면 큰엄마 일손도 바빠지기 시작했다. 겨우내 지저분해진 꽃밭을 정리하고 흙을 일구어 꽃씨를 뿌렸다. 두어 번 봄비가 내리고 나면 웃자란 잡초들을 뽑곤 했는데 큰엄마 옆에서 놀다가 심심해진 나는 잡초를 뽑는 일을 돕겠다며 노랗게 핀 민들레만 남겨두고 주위의 꽃모종을 모조리 뽑아서 큰엄마를 난감하게 만들었다. 아무리 설명해도 민들레를 작은 해바라기라고 고집하는 나 때문에 민들레를 뽑아버리지도 못하고 하얀 솜털 같은 씨앗이 되기까지 기다려 주셨다. 민들레가 둥근 공처럼 씨앗을 품고 대를 높여 바람에 날릴 준비가 되면, 큰엄마와 나는 그것을 꺾어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소원을 담아 후후 불었다. 어떤 소원을 빌었는지 기억은 없지만, 아마도 큰 엄마는 작고 연약한 민들레 씨앗들이 어미 꽃의 희망처럼 멀리멀리 날아가 누군가에게 기쁨을 주는 꽃이 되길 빌어주지 않았을까 싶다. 여리고 병약한 몸으로 일곱 남매를 낳고, 그 자녀들이 제각각 꿈을 찾아가도록 온 힘을 다해 뒷바라지했던 것처럼 말이다.

우리 선조들은 꽃의 등급을 매길 때 생김새나 향기로 평가하지 않고 꽃이 지닌 정신을 기준으로 정했다고 한다. 이른 봄 추위 속에서 피는 매화, 찬 서리를 이겨내는 국화, 잎에 절개가 있고 깨끗하며 은은한 향을 지닌 난초, 사계절 푸르며 휘어지지 않는 대나무를 사군자라 불렀다. 그런 기준으로 본다면 나는 민들레를 사군자와 함께 최고의 반열에 올려주고 싶다. 민들레의 자식사랑은 이 땅의 어머니를 닮았다. 척박한 땅에서 묵묵히 뿌리를 내리고 자녀들의 더 나은 삶을 위해 스스로 꽃대가 되어 주는 모든 어머니의 삶이 그 어떤 것보다 고귀한 삶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행에서 돌아오거나 힘들고 지칠 때 한국마트에 장을 보러 간다. 그곳에서 나는 수많은 민들레를 보며 위로 받고 힘을 얻는다. 남들보다 더 빛나고, 명예롭게 살고 싶었던 젊은 시절 내 목표는 “더 높이! 더 많이! 더 크게”였다. 돌아보니 어리석었다. 씨를 모두 날리고 초라한 구멍만 남은 민머리 민들레에서도 배울 만큼 낮아진 자신이 감사하다. 민들레 꽃씨가 높이 오른다. 저 꽃씨들이 이민자의 땅에서 힘겹게 살고 있을 누군가에게 희망과 기쁨이 되어주길 응원한다. 환하고 밝은 봄처럼!

정란숙
2017년 텍사스 중앙일보 한인 예술대전
문학부문 우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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