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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노은 여행기]이탈리아 남부 바리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여주인공의 고향
그리스로 떠나는 페리 경유지로 종일 북적
피자·파스타·포카치아 등 싼 먹거리 최고

바리(Bari)를 여행하게 된 동기는 한 편의 영화때문이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제작(공동), 감독, 주연한 영화 ,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이스트우드는 이 영화에서 영화음악가인 레니 니하우스와 함께 메인 테마, ‘Doe Eyes’를 작곡하기도 했다. 영화는 프란체스카 존슨(메릴 스트립 역)의 자녀들이 그녀가 남긴 3권의 일기를 읽으며 시작된다. 이탈리아에서 살다 GI남편을 만나 미국 오하이오의 작은 마을로 시집 온 프란체스카. 그녀는 예이츠의 시를 읊고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는 꿈 많고 서정적인 여인이었다. 하지만, 남편과 아이들을 사랑하며 현재의 삶에 순종하며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낡은 트럭을 몰고 한 남자가 프란체스카 앞에 나타난다. 그가 바로 프리랜서 사진작가인 로버트 킨케이드(클린트 이스트우드 역). 로버트는 전 세계를 돌며 사진을 찍는 자유여행가다. 그는 1965년 여름, 내셔널 지오그래픽지에 실릴 ‘로스먼 다리’를 촬영하기 위해 매디슨 카운티를 찿은 것이다. 길을 묻기 위해 찾아간 곳이 프란체스카의 집. 프란체스카의 남편과 두 아이는 ‘아이오와 주 박람회’에 참석하기 위해 4일 동안 집을 비우게 된다. 그녀는 자신의 고향 바리를 여행한 적이 있다는 로버트를 만나게 되어서 반가웠다. 운명적인 사랑이란 이런 것일까? 그들은 서로가 첫눈에 반하면서 가슴 떨리는 사랑을 하게 된다. 그녀가 남편을 만나기 전 살던 곳이 바로 이탈리아의 해안도시 바리였다.

바리는 이탈리아 남부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자 풀리아 주의 수도이다. 인구는 32만명. 여행객들이 바리를 찾는 이유는 이곳이 크로아티아 또는 그리스로 떠나는 페리 경유지이기 때문이다. 로버트가 바리에 가게 된 것도 그리스로 가는 페리를 타기 위해서 였던 것. 페리가 오고 가는 해안 도시에는 작은 보트들이 정박해 있고 갈매기는 원을 그리며 하늘을 날고 있었다. 경쾌한 마음으로 해안가를 걷다 보니 바리의 젊은이들을 만나게 됐다. 반갑다고 인사를 하니 이들도 호기심 많은 표정으로 웃으며 즐거워 한다. 미국 사는 한국인이라 말하고 사진을 찍으려니 서로 어깨동무까지 하며 포즈를 취해 준다.

바리의 중심인 페라레제 광장은 콘서트나 예술 공연들이 늘 펼쳐지는 곳이다. 페라레제는 17세기에 활약하던 상인으로 이곳에 여러채의 건물을 소유하고 있던 부호였다. 대장장이들도 많았는데 광장을 넓히려는 시의 행정 때문에 19세기에는 모두 다른 곳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넓어진 광장주위로는 레스토랑, 카페가 자리를 잡았고 주위의 돌벤치에는 시니어들이 모여드는 장소가 됐다.



점심시간에 현지인 소개로 찾아간 곳은 꽃 빵집(Panificio Fiore)이란 이름의 베이커리. 특별히 이곳에서는 피자 비슷한 포카치아를 파는 곳이었다. 현지인의 말로는 바리에서 가장 유명한 전통 베이커리로 ‘천국의 맛’을 자랑하는 곳이라고 했다. 포카치아는 한 쪽(1.5유로)만 먹어도 배가 부르고 맛 또한 좋은 편이었다. 나폴리를 비롯한 이탈리아 남부는 어디든 피자, 파스타, 포카치아가 있어 식사 걱정은 안해도 된다. 맛있는 음식을 아주 저렴한 가격에 먹을 수 있는 것은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 중 하나일 것이다. 로마의 휴일에서 그레고리 펙과 오드리 헵번이 함께 타던 것 같은 스쿠터가 길가에 주차돼 있다. 이탈리아에서는 할리데이비슨 같은 큰 모터사이클은 없고 작은 스쿠터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다.

산 세비노 성당은 바리의 두오모로 산세비노 주교를 위해 건축된 성당이다. 11세기에 비잔틴 양식으로 지어졌지만 후에 파괴됐다. 두오모가 아풀리안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다시 건축된 것은 13세기 후반. 지하에는 동상 또는 실물 크기의 인형으로 보이는 물체가 유리관 속에 누워있었다. 가까이 가서 살펴 보니 그것은 인형이 아니라 갈리아(Gaul) 지방에서 발견된 여인의 시신이었다. 스페인 출신의 처녀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서기 273년 참수되었지만 지금은 완벽하게 보존된 몸으로 두오모 지하에 잠들어 있다.

바리에서 두오모보다 더 유명한 성당은 1197년에 건축된 산 니콜라 성당이다. 성인 니콜라스에게 헌정된 성당은 그의 성유물을 모시기 위해 지어진 것이다. 성인은 315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성인에 대한 소문과 기적은 지중해 선원들 모두에게 확산됐다. 그러자 1089년 바리 선원들이 터키 미라(Myra)에 안치돼 있던 성 니콜라스의 성유물을 가져간 것이다. 일종의 전리품이었는데 62명의 선원들은 바리 번영을 위해 훔치는 일까지도 서슴치 않았던 것이다. 당시 성인의 유해를 약탈해 가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는 유해를 잘라 머리는 이쪽, 팔과 다리는 저쪽으로 분산시켜 놓기도 했다. 성인 니콜라스의 몸은 일종의 거룩한 기름이 스며 나오도록 모셔져 있다. 그리고 이 거룩한 기름은 바로 옆에 있는 숍에서 구입하기도 한다.

스베보 성은 1156년 시칠리아의 왕 로저 2세가 세운 것이다. 1233년에는 시칠리아 왕을 겸했던 신성 로마제국의 호엔슈타우펜의 프리드리히 2세가 개축, 보강했다. 현재는 바리 시의 다양한 유물을 전시하는 고고학 박물관으로 일반에게 개방하고 있다. 전시관에는 풀리아 주의 조각 장식, 비잔틴 시대의 종교 기념물 등 다양한 유물들이 전시돼 있다. 입장료는 일반 2유로.

‘흰나방 날개짓 하는 밤에 들리세요, 언제라도 좋아요’. 프란체스카는 예이츠의 시를 인용, 로버트를 향한 사랑의 문을 활짝 열어 놓았다. 그리고 시작된 4일간의 사랑은 너무 짧았지만 그 여운은 길고도 길다. 프란체스카의 곁을 떠나기 전 로버트는 이렇게 말한다. “할 이야기가 있소. 한가지만. 그리고, 다시는 말하지 않겠소 누구에게도. 당신이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소. 애매함으로 둘러싸인 이 우주에서 이런 확실한 감정은 단 한 번만 오는 거요. 몇 번을 다시 살더라도 다시는 오지 않을 거요.”

프란체스카는 아쉬운 마음에 눈물을 흘리면서도 로버트 킨케이드를 따라 가지 않았다. 프란체스카와 로버트가 함께 도망 갔거나 강물에 뛰어 내렸다면 감동없는 흔한 이야기로 끝났을 것이다. ‘당신을 사랑한 댓가가 너무 고통스러울거예요’. 그 후 20년 간을 그리움으로 채색된 사랑을 가슴에 안고 살아간 그들의 이야기. 여기에 우리는 아직도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를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유언장을 통해 그녀는 아들과 딸에게 부탁을 한다. 킨케이드를 따라 가지않고 후회없이 가족들을 사랑했으니, 죽어서는 그의 곁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진심으로 너희를 사랑한다. 너희들은 행복을 위해 노력하며 살거라, 세상은 정말 아름다운 곳이란다.’ 프란체스카가 아들과 딸에게 남긴 마지막 말이다. 그녀의 고향인 이곳 바리에서 나는 킨케이드가 되었고 아내는 프란체스카가 되었다.


글, 사진: 곽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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