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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원 칼럼] 잊혀져가는 4.19 민주화운동

이제는 60대 후반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나 기억에 남고, 잊혀져가는 4·19 혁명. 1960년 4월 19일 ‘피의 화요일’이라고 불리는 그 날 대학생은 물론 중고등 학생들의 시위는 서울을 비롯하여 대구, 부산, 마산, 제주 등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심지어 어린 수송초등학교 학생들까지 “부모 형제들에게 총부리를 대지 말아 달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데모에 참여했다. 이것이 바로 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항거해 시민들이 들고일어나 제1공화국을 종식한 4.19 민주주의 시민혁명이다.

당시 집권당이었던 자유당이 저지른 3.15 부정선거에 시민들이 항거하여 대대적으로 일어난 이 시위는 아시아 역사상 최초로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민주주의 시민혁명이었다. 때는 6·25 동란이 휴전 협정으로 막을 내린 지 불과 7년밖에 지나지 않은 격정의 시절이었다. 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제대로 해결되지도 못한 시점에서 반독재와 부정부패로 시달리며 살아가야만 했던 춥고 배고팠던 암울한 시기였다. 오죽했으면 국민은 “배고파 못 살겠다. 죽기 전에 갈아 보자”라는 구호를 외칠 정도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독립과 건국에는 공을 세웠지만 국민의 허기를 채우는 데는 실패했다. 게다가 이승만 대통령의 장기집권과 집권당 자유당의 사사오입 개헌과 관료들의 부정부패는 의분에 찬 학생들의 저항에 부딪혔다.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 부정선거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마산에서 학생과 시민 규탄대회가 열렸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4월 11일, 그동안 행방을 알 수 없던 마산상고 김주열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무참하게 살해된 시체로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되자, 전국의 학생들과 국민의 분노는 극에 달하게 된다. 이어 4월18일 ‘고려대 피습사건’이 발생했다. 시가행진을 마친 고려대 학생들이 학교로 돌아가는 도중 대한반공청년단과 폭력배로 조직된 화랑동지회가 주도한 피습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격분한 시민과 학생들은 거리로 뛰쳐나왔고 이것이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서울 시내가 무정부 상태가 되자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모든 학교는 강제 휴교령이 내려졌다. 그리고 국민의 존경과 지지를 받던 대통령 후보 조병옥 박사가 선거를 한 달 앞두고 미국에서 사망하면서 국민은 큰 충격에 빠졌다.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도 국민의 추앙을 받던 해공 신익희 선생이 선거일을 열흘 남기고 호남선 열차 속에서 서거한 지 4년 만에 또다시 비보가 전해진 것이다.



그 당시 유정천리라는 노래는 ‘유석(조병옥 박사 호) 애도가’로 개사해 불리며 혁명의 불씨를 더하게 만든다. 가련다 떠나련다 해공(신익희 선생 호)선생 뒤를 따라 장면 박사 홀로 두고 조 박사도 떠나가네 (중략) 터졌네 터트렸네 학도들이 터트렸네 4.19의 혁명 정신 너도나도 이어받아 독재 없고 부정 없는 살기 좋은 한반도 무궁화 꽃 삼천리에 격양가를 불러 보세.’

4·19 혁명은 전국적으로 186명의 사망자와 6,026명의 부상자라는 엄청난 희생자를 냈다. 한국 민주주의의 기틀을 잡아준 시발점이었다. 그러나 세월은 흘러, 1987년 6월 제5공화국 시절 시위 참여 중 전경이 쏜 최루탄을 맞고 사망한 이한열은 기억하지만 “독재 없고 부정 없는 살기 좋은 한반도 만들어보자”던 이들의 할아버지, 할머니인 선배들의 희생은 세월에 묻혀가고 있다. 지금 70~80대로 살아가는 노인들의 아련하고 가슴 아픈 추억의 한 페이지로 남을 뿐이다.

김태원/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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