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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창현의 시가 있는 벤치] 눈 오는 날 -임창현

내 어제가 온다
오래, 오래된

어제가 온다
친구의 편지 같이,
열여섯 그날
아내의 얼굴 같이,



온다
떠나간 자식들의 어린 날
얼굴,
얼굴,

나도 온다
나도 소년 되어
온다.


벌써 겨울이 저만치 왔다. 남자들은 가을과 겨울을 좋아한다. 화자는 아침 여섯시면 꼬박 산책을 나간다. 언제나 조금 키 작은 여자가 뒤따른다. “물렀거라, 귀인 행차시다, 물렀거라.” 아내를 뒤세우고 막대기로 아침 숲 가른다. 숲 속 거미줄 헤치며 가는 것이다. -아침마다 밟아서 잎들이 납작해졌네. 새 낙엽이 그 위로 더 질 테고, 이내 또 눈 내리겠지? 매일 아침 우리는 이 길을 건너 하루만큼씩 저 아래 삶으로 내려가는데 숲, 나무, 바위들은 언제나 저대로이지. 언제나 저대로---. “너무 그렇게 생각하지 마, 허무하잖아?” “그래, 아무것도 우리를 돌려놓을 수 있는 건 없겠지.” 화자가 말하고 여자가 하는 대답이다. 무상한 세월을 탓하는 화자의 아픔이 달리 갈 곳도 없다. 확실한 사실, 다시 지고 가는 가을, 뒤에 올 겨울 숙연히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예감이다. 시인의 가슴 속엔 벌써 예감의 눈이 온다. 어릴 적 기억처럼, 설렘처럼, 사랑하는 아들의 앳된 얼굴처럼, 자신의 소년 때처럼. 그 시절 맞던 눈, 티 없이 맑았던 얼굴처럼, 우리들의 눈망울처럼 익숙한 환희가 온다. 화자는 벌써 깊은 가을 속에서 겨울을 맞고 있다. 눈을 맞고 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소녀의 마음’처럼 시인은 언제나 미리 느끼고 준비를 하던가? 눈 속에는 그리운 사람들이 내려온다. 하늘 가득 전생 살았던 사람들이. 그래서 화자는 생각만으로도 기쁘다. 기쁨은 하얗다. 그리운 사람들이 세상 고향 잊지 않고 오는 겨울, 시인도 죽으면 눈 되고 싶다. 눈 되어 다시 이 땅에 돌아오고 싶다. 올해는 동남부에도 눈이 많이 온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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