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기사공유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
  • 공유

[삶의 향기] '내가 왕년에 … '라는 유혹

중학교 2학년 때로 기억된다. 종로서적에서 큰마음을 먹고 예쁜 노트를 하나 구입했다.

노트의 구석구석에 나무와 과일과 사랑의 하트와 해와 달과 별이 가득했다. 단색으로 된 단순한 그림들이었지만 어린 내 가슴은 왜 그리도 세차게 뛰었는지. 나는 새 노트를 펼쳐 한 페이지에 한 문장씩 여러 위인들의 명언을 적어갔다.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류의 상투적인 말도 있었고, '실패는 인생의 피상성을 사정없이 부수어버리는 망치이다'와 같은,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출처를 알 수 없는 괴이한 문장들도 있었다. 그 외에 어떤 말들이 있었는지 많이 생각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노트의 맨 앞에 큰 글씨로 적혀 있던 문장, 내가 제일 좋아했던 문장은 잊을 수 없다. '내일 지구가 멸망할지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라는 스피노자의 말이었다.

왜 그 말을 그렇게 좋아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졸지에 머리를 박박 밀고 검은 교복을 입은 청춘이 그런 문장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 또한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언젠가 학교는 불타오를 것이고 지구는 멸망할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어쩔 수 없이 오늘도 저 폭력과 욕설이 난무하는 학교로 나가 하루를 견뎌야 했다.

정작 스피노자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을 아주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하지만 크게 상관없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의 가수 이름을 잘못 알았다고 해서 노래가 싫어지는 건 아니니까. 다만 지금의 나에게 이 문장은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다.



이 말을 지어낸 이는 유쾌한 농부였으리라. 그는 아마도 사과나무 심는 일을 좋아했을 것이다. 내일 비가 오면 어떻고, 바람이 불면 또 어떠랴. 사과나무를 심으며 장차 여기에 달릴 사과를 상상하고 그 풍성한 소출을 사랑하는 가족들과 같이 나눌 일을 계획했을 것이다. 그 문장이 중학교 2학년의 나에게는 엄중한 의무를 노래하는 행진곡이었다면, 지금의 나에겐 자기 내면의 행복과 상상의 기쁨을 노래하는 유쾌한 찬가이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요사이 부쩍 많이 생각하게 된다. 분명한 건 앞으로 남은 시간이 점점 짧아진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무엇인가를 상상하고 이를 통해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기 어려워진다. 많은 계획들은 당연히 이미 내 앞을 지나갔다. 이를테면 결혼 계획이 그러했고 아이를 가지는 계획이 또한 그러했다. 내 경우만 해당되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부동산 투자 계획과 창업 계획이 그러했다. 여기에 더해 꺼내 들었다가 슬그머니 바닥에 내려놓는 일들의 목록도 쌓여만 간다.

낡은 기타를 잡고 몇 번 쳐보다 마음이 동해서 다시 배울 수 있는 학원을 알아보았으나 이내 접고 말았다. 조금 더 잘 쳐서 이제 뭘 어쩌자는 건지. 물론 요새 말할 수 없이 바쁘기도 하고.

결국 이 모든 일이 앞을 길게 내다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시선이 자꾸 지난 일로 향하고, 결국 술자리에서 "내가 왕년에" 화법을 자주 구사하고 싶은 유혹을 참기 어려워진다.

장래 계획을 세우기 어려워지면 기준을 마련하기 힘들어져서 마음 속 여러 일들 사이의 우선 순위를 결정하는 데에 애를 먹는다. 그러니 눈에 띄는 일들을 닥치는 대로 처리하면서 단순히 생존 증명 혹은 생존 의지 증명을 시도하게 된다.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는 이를 "분주한 게으름"이라 표현한 바 있다. 그의 독설에 따르면, 이런 이들은 아침에 일찍 나가 저녁 늦게 집에 돌아오는 개미 같은 삶을 살고 있는데, 도대체 뭘 하며 살고 있는지 물어도 대답도 못 하면서, 심지어 길에서 가끔 마주 오는 다른 사람을 들이받아 자신도 넘어지고 남도 넘어뜨린다는 것이다. 이렇게 살면서 하루 종일 남들을 만나러 돌아다니지만 정작 자기 자신과는 한 번도 제대로 만나지 않는다는 데에 이런 삶이 가지는 비극의 핵심이 있다고 그는 주장한 바 있다.

올해 또다시 여러 일을 계획하고 있다. 그건 무엇인가 변화를 시도하는 일이고 일의 결과를 즐겁게 상상하는 일이다. 또한 변화를 추구하는 내 자유를 경험하며 내 가장 소중한 욕구와 마주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아주 장기적인 계획도 자꾸 마련해볼 생각이다. 별것 아닐 수 있지만, 인생에 이런 것 말고 또 다른 무슨 별것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래서 오늘도 내 사과나무를 심으러 나간다.

세웠던 계획을 지우고 다른 그림을 그려 넣기도 하지만, 시선을 앞으로 두고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려고 노력한다. 설이 이제 막 지났다. 한 해의 일을 계획하고 설계하는 데에 양력이면 어떻고 음력이면 또 어떤가. 올 한 해 모두의 정원에서 사과나무가 탐스러운 결실을 맺길 빈다.


김수영 / 한양여대 문예창작과 교수·출판인



Log in to Twitter or Facebook account to connect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help-image Social comment?
lock icon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