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뜨락에서] 데스밸리(Death Valley)를 지나며

혹한을 피해 2월에도 목련을 볼 수 있는 서부로 건너갈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치열한 일상이 있는 뉴욕과는 달리 서부의 낭만에 익숙해지던 날, 내친김에 데스밸리도 다녀오자고 마음먹었다. 언젠가 꼭 한번은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던 이유 중 하나는 그 이름 때문이었을 것이다. '죽음의 계곡.' 조금은 낯설면서도 호기심을 끌던 곳. 2월은 데스밸리를 다녀오기에 좋은 계절이기도 했다. 세 팀이 렌트카를 해서 2박3일 여정으로 길을 떠났다.

데스밸리로 들어가기 전, 올란차(Olancha)에서의 하룻밤은 마치 서부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100년은 넘었을 낡은 모텔이었다. 인터넷에 올라온 사진만을 보고 결정한 우리의 불찰이었다. 그나마 위로가 된 것은 맑고 고운 별빛이었다. 손을 대면 금방이라도 별들이 우르르 머리 위로 쏟아질 것만 같던 밤. 도시를 떠나야 비로소 별들과 가까워지는 법인가 보다.

이튿날 서둘러 길을 떠났다. 데스밸리 안내를 따라 한참을 달려도 관광객의 그림자는 보이지도 않았다. 죽음의 계곡이라서 이었을까? 잠깐 섬뜩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절벽 위 조망대에 이르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먼저 데스밸리에 도착해 있던 아침해가 바람과 함께 우리를 맞았다. 눈부신 모래산과 언덕. 사막의 바람이 수백만 년을 돌고 돌아 만들어 놓은 빛나는 작품이었다. 인간의 손으로는 빚어낼 수 없는 장관, 때묻지 않는 자연은 그렇게 우리에게 또 한 번 겸손을 가르치고 있었다.

자브리스키 포인트(Zabriskie point)에 이르자 지금까지의 풍경과는 다른 풍광이 펼쳐졌다. 금빛을 두른 바위들이 물결처럼 출렁이고 있었다. 500만 년 전에는 바다였다는 자리, 물이 마르면서 지각변동으로 생긴 바위들이었다. 바닷속 광물에 따라 퇴적층의 빛깔이 검게 푸르게 때론 붉게 빛나고 있었다. 제 각각 다른 융기들의 모습을 보면서 부침하는 우리의 삶을 잠시 생각해 보았다.

가장 기대를 하며 달려갔던 배드워터(badwater)에 이르자 실망하는 소리들이 들렸다. 하얀 소금밭으로 덮여 있을 장관을 기대했는데 얇은 소금길이 전부였다. 한때는 바닷물이었지만 덥고 건조한 날씨로 점차 말라 들어가 버린 배드워터. 소금 한쪽을 떼어 입안에 넣어 보았다. 흙냄새가 나는 짠맛, 매일 매일을 고달프게 살아가는 우리의 찝찔한 인생의 맛과 닮은 듯 했다. 절벽 위 새겨놓은 해발 85m라는 표시가 눈에 들어왔다. 걷고 있는 이곳이 깊은 바닷속이었다니, 어렸을 적 들었던 바다의 전설들이 한꺼번에 온몸을 휘감는 듯 했다.

바닷물은 말라 버리고 허옇게 혹은 푸르고 붉게 흔적만을 남기고 있는 데스밸리. 금광을 찾아 서부로 떠났던 사람들이 지름길을 찾겠다고 잘못 들어섰다가 죽을 고생을 했다는 죽음의 계곡. 계곡은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말없이 몸으로만 말하고 있었다.

이름은 하나의 상징이었을 뿐이다. 죽음의 계곡에서 실제로 죽은 사람은 몇 되지 않는다고 한다. 긴 세월 동안 자연이 만들어놓은 신비를 감탄하고 가는 길인지도 모르겠다. 어느 새 서녘으로 지는 저녁해가 산봉우리에 불꽃을 피우고 있다.

사막의 돌처럼 거북의 등껍질처럼 거칠고 딱딱한 세상, 깊은 현실의 골을 지나고 있는 젊은이와 노동자 그리고 가난한 이들의 한숨도 한 바람에 쓸어가 저 반듯한 분지처럼 품어 주었으면 좋겠다. 힘겨운 시간을 건너 그 끝 어디선가 나도 죽음의 계곡을 무사히 지나왔다고 환히 웃을 수 있는 날이 모두에게 오기를 기대해 본다.


임혜숙 /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