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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뜨락에서] 도토리묵의 감칠맛

아름드리 참나무가 만드는 도토리의 숫자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사월 산벚꽃 몽오리가 터질 무렵이 되어서야 모든 잎을 내려 놓고 새 순을 내는 참나무 때문에 겨울도 포근하다. 가을비가 내리고 바람 부는 날이면 지붕이며 베란다로 도토리 떨어지는 소리가 다람쥐들의 향연을 음악으로 만든 것 같다. 누군가의 자필 악보를 몰래 펼쳐 보는 상상으로 가을 밤은 깊어만 간다.

잔디에 떨어진 도토리들을 말끔히 치우지 않으면, 봄이 되어 여기저기 아기 참나무가 뿌리를 질기게 내려서 깔리니 여간 성가신 게 아니다. 그렇게 긁어내고 주워낸 도토리는 산에 버린다.

내가 일하는 곳 앞길에 빈 박스를 엎어놓고 그 위에 보자기를 깔아 놓은 좌판… 도토리를 파는 할머니가 계셨다. 한 모를 사다가 양념 해서 무쳐놓으니 누구도 흉내내기 어려운 옛날 할머니의 도토리 맛이었으니 너무 놀라웠다. 김포의 뒷산에서 도토리 줍던 코흘리개 어린 나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그렇게 도토리 할머니는 나의 벗이 되었는데, 근방의 공원에서 가을이면 도토리를 주워다가 손수 만드는 거라고 하시며, 도토리가 별로 없다는 게 아닌가….

그날부터 나는 더욱 열심히 도토리를 주워다 드리고 맛있는 묵을 얻어다 먹게 되었다.



몇 년이 흐르고, 어느 날 도토리할머니는 이렇게 진짜 도토리 만드는 사람이 미국에는 없을 것이라며, 나에게 감칠 맛나는 비법을 일러주시겠다고 약속을 받았다. "할머니 저 어디서 일하는지 아시죠?" 하며 손가락으로 간판을 가리키니, "알고 말고…도토리나 많이 줏어놔요…." 철썩 같이 또 다짐을 받아놓았다. 그 동안 산에다 내 버린 도토리에서 수도 없이 많은 도토리가 산에서 자라나고 있었으니 언젠가는 뉴욕에서 가장 맛있는 묵을 만들 상상도 해가며 겨울을 견딜 수 있었다.

그러나 다음 가을이 되고 내가 모아놓은 도토리가 말라 갈 때에도 도토리할머니는 나는 찾아오지 않으셨고 좌판도 없이 괜시리 기다림만 쌓이고 있었다.

늙어서도 길거리에서 묵을 해서 팔아야 하던 것 때문이었을까‥도토리할머니의 쓸쓸하던 눈빛에서 잊었던 고향의 뒷산의 버섯이며 할미꽃 밤나무 가축들의 울음소리를 다시 기억하며 기다려도 그 할머니는 만날 수 없었고, 나도 더 이상 그곳에서 일을 하지 않게 되었으니 또 하나의 기억을 접고야 말았다. 안녕, 안녕….

숲에서 나무들은 아무 일 없다는 듯 햇살과 바람을 즐기며 자라나고 있지만,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기억들이 자꾸자꾸 늘어나니, 오늘도 나는 일기에 마침표를 찍지 못하는구나.


허금행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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