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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흡 칼럼] 쫑즈를 먹으며 굴원을 생각하다

[애틀랜타 중앙일보] 발행 2020/01/23  0면 기사입력 2020/01/22 12:53

며칠 전 시니어센터에서는 그동안 한솥밥을 먹으며 함께 지내던 중국 친구들을 분가시키는 조촐한 전별(餞別) 행사가 있었다. 이들은 그동안 애틀란타 지역에 중국인들을 위한 노인복지센터가 없어 2년 전부터 청솔시니어센터에 들어와 한국인 친구들과 어울려 지내왔는데 최근 중국인들을 위한 노인복지센터가 생기면서 그 일부가 새로운 보금자리로 떠나가게 된 것이다.(나머지 상당수는 한국센터가 좋아 그대로 잔류했다).

그들은 이날 한국 친구들을 위해 애정과 정성이 담긴 선물들을 많이 준비해 왔다. 그 중에는 중국의 전통음식인 ‘쫑즈(粽子)’도 들어 있었다. ‘쫑즈’는 댓잎이나 갈대잎에 찹쌀을 넣어 찐 음식이다. 우리 부부가 중국에 체류할 때 단오절에 먹던 쫑즈는 댓잎의 그윽한 향과 대추의 달콤한 맛이 쫀득쫀득한 찰밥과 어우러져 맛이 괜찮았다. 쫑즈‘는 전국시대 때 초(楚)나라의 충절시인인 굴원(屈原)을 기리기 위해서라고 한다.

굴원은 견문이 넓고 역대의 치란(治亂)에 밝아 회왕으로부터 신임이 두터웠다. 굴원이 회왕의 명을 받아 초나라를 부강하게 하기 위한 헌령을 기초하고 있었는데 굴원과 왕의 은총을 다투던 상관대부 근상이 그걸 가로채어 자신의 공적으로 삼으려 하였으나 굴원은 이를 거절했다. 근상은 이에 굴원을 회왕에게 참소했다. 현명치 못한 회왕은 근상의 말을 믿고 굴원을 멀리했다. 굴원은 왕의 듣고 보는 것이 총명하지 않고 참소와 아첨이 임금의 밝음을 가로막는 것을 근심하고 비통해 하면서 장편의 시를 지어 그의 울분을 토로하니 이 시가 유명한 굴원의 ’이소(離騷)‘이다. “님과 이별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님의 마음 자꾸 바뀌시는 것이 가슴 아파라.” 간신의 말에 휩쓸려 줏대 없이 흔들리는 임금에 대한 아쉬움이 드러난다.

굴원은 제(濟)나라와 연합하여 진나라에 대항해야 한다고 주장한 친제파(親濟)派)였다. 당시 초나라는 굴원의 반대파인 친진파(親秦派)가 득세하고 있었는데 이들 친진 세력들은 진(秦)나라의 장의가 6백 리의 땅을 베어주겠다는 미끼에 속아 제나라와 친교를 끊었다. 그 후 끊임없이 진나라의 침략을 받게 되고 초나라가 고립무원의 지경에 이르게 되자 회왕은 굴원을 불러들여 다시 등용하려고 하였다. 굴원은 오직 조국 초나라에 공헌하겠다는 일념으로 수도인 영(郢)으로 돌아왔으나 재차 근상의 참소를 입어 강남 지방으로 추방되는 비운에 처해졌다.

굴원은 상수(湘水)가를 방황하면서 웅혼(雄渾)의 시’천문(天問)‘을 써냈다. 172가지 문제를 제기하여 비통한 울부짖음으로 천지에 의문을 호소했다. 굴원은 또 일련의 역사의 공죄(功罪)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요컨대 자신의 뜻을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 그의 뜻을 펴지 못하고 불우한 방랑의 신세가 됨으로 인하여 모든 전통적인 사고방식을 긍정보다는 먼저 의심하는 눈으로 관찰하여 사회의 본질을 통찰하고 자연계를 판단하는 자세로 미래를 모색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시인으로서의 소질과 풍격(風格)을 갖췄을 뿐 아니라 사상가 정치가로서도 훌륭한 품격을 갖춘 사람이었다.

굴원이 상수(湘水)가에 이르러 머리털을 풀어헤치고 못가로 다니며 침음(沈吟)하니 그의 모습은 아주 파리하고 수척했다. 어부가 그를 보고 물었다. “당신은 상려대부가 아니십니까. 무슨 까닭으로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굴원이 대답했다. “온 세상이 혼탁하되 나 홀로 맑으며 많은 사람들이 취하였으되 나 홀로 깨었소. 내 이런 까닭으로 쫓겨나 이 지경이 되었소.”

굴원은 이런 가운데서도 나라에 대한 걱정을 한시도 잊은 일이 없었다. 경양왕 19년(기원전 280) 초나라는 지금까지의 친진(親秦)정책에서 180도 전환하여 반진(反秦)정책을 펴 여러 제후의 나라에 사자를 보내어 반진(反秦)동맹을 재건하려 했다. 그러나 이를 눈치 챈 진(秦)나라는 초나라를 공격하여 한북과 상용의 땅을 빼앗고 다음 해에는 또 서릉을 빼앗았다. 경양왕 27년(기원전 278)에는 진나라 장수 백기(白起)가 드디어 초나라의 수도 영을 함락하고 선왕의 무덤인 이릉을 불태워버리니 경양왕은 진성(陳城)으로 후퇴했다. 다음해에는 다시 초나라의 무(巫)와 금중을 점령하니 이곳은 초나라의 운명이 걸려있는 곳이었다. 일찍이 회왕이 진나라에 억류당하면서까지도 끝끝내 내놓지 못하겠다고 버티던 요충지였는데 이제 진나라가 무력으로 빼앗아버린 것이다.

굴원은 이 소식을 듣고 조국의 앞날에 절망한 나머지 분연히 ’애영(哀郢)과 회사(懷沙)의 시‘를 짓고 멱라수(후난성 상수의 지류)에 몸을 던져 순국하니 이때 그의 나이 62세였다.

말할 수 없이 무도한 세상을 만나 그 몸을 버렸구나. /아아, 슬프다! 좋지 않은 때를 만났으니 /봉황은 숨어 엎드렸는데 올빼미가 이리저리 날아다니는구나. /나쁜 사람이 귀한 몸이 되고 아첨하는 자들이 뜻을 얻었도다. /성인과 현인이 끌려 다니고, 올곧은 사람들이 뒤바뀐 자리에 놓였구나.

한(漢)나라의 천재 학자 가의(賈誼)가 지은 ’조굴원부(弔屈原賦)‘의 한 대목이다. 간신들의 모함을 받아 머나먼 외지로 부임하던 길, 그 답답한 마음을 굴원에 대한 조사(弔辭)를 빌려 토로하고 있다.

애국 시인이었던 굴원은 중국 시가의 세계에서나 중국인의 생활면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후난성 도강현에 있는 굴원에 얽힌 고적의 하나인 천문대(天問臺) 구지(舊址)는 지금까지 완전히 보존되어 있으며, 투신자살한 멱라수 가에는 그의 무덤과 사당이 세워져 있다. 굴원이 죽은 음력 5월 5일은 단오절이라 하여 그를 추모하는 제일(祭日)로 정해졌다. 매년 이 날이 되면 강남 지방의 사람들은 뱃머리에 용의 머리를 장식한 용선의 경주를 성대히 벌이고 갈대잎으로 싼 송편을 멱라수 물고기에게 던져주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물속에 잠긴 굴원이 물고기에게 뜯어 먹히지 않도록 하기 위한 놀이라고 한다.

쫑즈를 먹으면서 단오(端午)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과 함께 멱라수에 빠져 죽은 굴원이 읊은 ’어부사(漁父辭)‘의 마지막 구절이 생각났다. “창랑(滄浪)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을 것이요,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으리.”

망해가는 조국의 현실 앞에서 고뇌했던 인간 굴원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흔히 고난과 절망의 시간이 닥쳐오더라도 언젠가는 끝날 거라 믿으며 맞서 싸우라고 말한다. 노력을 포기하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라고 격려한다. 하지만 끝내 그 시련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경우도 많다. 실패와 좌절이 계속되고 질식할 것 같은 세상의 어둠이 더욱 짙어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나이가 들면서, 세상살이에 부닥치면서 굴원이 고민했던 탁영탁족(濯纓濯足)의 처세는 내 화두 중의 하나였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라는 생각이 오늘따라 새삼스레 든다.

김건흡 애틀란타 청솔시니어센터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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