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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영 칼럼] 해바라기 가족 사진

[애틀랜타 중앙일보] 발행 2020/01/24  0면 기사입력 2020/01/23 14:47

내과 의사인 친구가 뉴욕 양로원에서 94세인 그의 어머니를 자신이 메디컬 디렉터로 있는 양로원에 모셨다. 권사님 생명이 며칠 안 남았다고 했다. 목요일 저녁 우리 부부는 양로원에 가서 권사님 방을 찾아 들어가니, 병문안을 온 이웃 자매와 권사님의 두 며느리가 침대 주위에 서 있었다. 침대에 누운 권사님을 봤다. 의식을 잃은 채 눈을 감고 누워 있는 권사님, 얼굴이 좀 부었고 가슴까지 덮인 담요 밖으로 나온 왼팔에는 붕대가 감겨있다. 붕대 밑으로 가는 튜브가 보이고 그 튜브는 침대 옆에 쇠막대기에 거꾸로 매달린 병으로 연결되어있다. 얼굴을 가로질러 콧속으로 두 끝이 들어가게 한 또 하나의 튜브가 침대 옆에 선 기계로 연결되어있다.

친구의 아내, 권사님 큰 며느리가 “어머님” 하고 큰 소리로 권사님을 깨워본다. 깨어나시면 우리 얼굴을 알아보실까 해서 나와 아내는 상체를 권사님 쪽으로 기울여 본다. 권사님 얼굴은 아무 반응이 없고, 평안하다. 감긴 눈, 조금 부어오른 얼굴, 권사님은 숨을 쉬는 신호가 조금씩 움직이는 가슴팍의 담요로 느껴진다.

권사님의 딸이 왔다. 아들 형제와 유복자로 태어난 딸. 그녀는 우리와 인사를 나누고 어머니의 손등을 쓰다듬는다. 전직 간호사였던 그녀는 어머니의 부은 팔 소매를 걷어 테이프 자국을 거즈로 닦아낸다. 왼쪽 어깨를 가볍게 들어 올리고 어깨 밑도 거즈로 닦아 낸다. 오래 누워 있는 환자의 등창을 방지하느라 등을 닦는 손길, 조용한 그러나 사랑의 보살핌의 손길, 기도하는 모습이다.

병원에서 일을 마친 친구도 왔다. 그는 어머니의 얼굴을 살피고, 옆에 비어있는 침대에 앉았다. 권사님 침대 주위로 다섯 명의 여자 두 명의 남자, 모두 권사님과 연관된 이야기를 나눈다. 권사님 딸은 아직도 권사님 몸을 만지며 보살핀다.

친구가 들려준 6·25 난리 때 이야기 한 토막이 생각났다. 과부인 엄마가 어린 아들 둘과 유복자로 태어난 딸을 데리고 떠난 피난길, 어머니는 피난 짐을 이고, 지고, 들고, 초등학교 2학년인 장남인 친구가 아기인막내 여동생을 등에 업고 갔다. 누군가 아기를 버리고 가자고 했다. 그때 친구는 “나는 동생 못 버려”라고 했단다. 그리고 아기를 업고 갔던 추운 겨울 피난길 이야기가 떠올랐다. 이제 그 딸이 임종의 엄마를 사랑의 손길로 보살핀다.

큰 며느리가 사진 봉투를 나에게 건넨다. 권사님 임종이 가깝다는 소식에 손자 손녀들이 할머니를 뵈러 왔을 때 찍은 사진들이다. 그중에 해바라기 사진은 예술 작품이다. 젊은 손자들과 손자며느리 얼굴들이 동그란 원을 만들고 그 가운데 권사님의 얼굴이 있다. 의사가 된 손자는 할머니 옆얼굴에 키스한다. 해바라기 꽃 중에 아름답고 빛나는 꽃 모양이다. 손자들의 권사님에 대한 친근감이 권사님 돌아가시는 길을 환하게 밝히는 것 같다. 손자 손녀 중에는 부자가 된 증권회사 직원, 의사, 약사, 치과의사, 변호사, 호텔 주방장, 패션모델도 있다.

의사가 된 큰아들이 미국에 오고 그의 가족이 전부 미국에 왔다. 바쁜 이민 생활 속에 태어난 손자 손녀들, 그들을 기르는 것은 권사님 몫이었다. 내 새끼 내 강아지들을 사랑과 헌신으로 길렀다. 사랑과 헌신으로 기른 손자 손녀들이 권사님 임종을 보려 멀리에서도 와서 권사님의 마지막 길 위의 어둠을 사랑으로 걷어내는 해바라기 꽃으로 환하게 피었다.

가족들의 사랑 보살핌 속에 권사님의 생명 촛불이 마지막 몇 분을 타고 있다. 권사님의 표정은 맑고 평안해 보인다. 그 평안한 표정을 보고 있노라니 내 선입관이 변하고 있었다. 죽는 순간의 괴로움, 슬픔, 더 못사는 아쉬움, 못다 한 미련, 앞으로의 걱정, 뭐 그런 것들로 어둡던 죽음의 그늘, 그 의식의 그늘에 밝은 빛이 비친다. 죽어 가는 권사님 얼굴은 편안하고 잔잔하다. 병고의 흔적도 없고, 못다 한 삶의 미련도 자식들 앞으로의 걱정도 없다. 자식들의 위로와 보살핌, 살아서 알고 지내던 이들의 방문, 양로원 직원들의 예절 바른 대우 속에, 이젠 삶의 고뇌를 다 놓고 죽음의 마지막 문턱을 편하게 넘으신다. 바쁜 하루를 마치고 잠드시는 것 같다.

토요일 이른 아침, 아내가 전화를 받았다. 권사님의 큰 며느리였다. 전날 저녁 권사님이 운명 했다고 한다. 마음으로 속삭였다.

“권사님, 힘든 세월 잘 참아내시고, 아들딸, 손주들 잘 길러주셔서 감사해요. 이젠 하늘나라에서 편히 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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