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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우리말] 김칫국 주례사

본인의 결혼식 때 들었던 주례사를 기억하나요? 정신없이 지나가는 하루에 주례사의 내용이 일상적이었다면 당연히 기억하기 어려울 겁니다. 비교적 인상적인 내용이었다고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잊히게 마련이겠죠. 저도 가끔 주례를 섭니다만, 제 주례사조차 기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요즘은 짧은 주례사를 선호하여 핵심을 찌르는 몇 마디만을 들려주어야 합니다. 어차피 곧 잊을 것이기에 큰 기대를 하지 않으면서 말입니다.

저의 결혼식 주례는 제 은사이신 서정범 선생님께서 해 주셨습니다. 당시에 선생님께서는 텔레비전에도 자주 나오는 유명한 분이셨기에 주례에 대한 관심도 많았습니다. 그 날의 주례사는 무척 길었습니다. 일부러 길게 하였다기보다는 하객들이 주례사에 집중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반응이 없었다면 아마도 일찍 끝내셨을 겁니다. 모두 지루함 없이 빠져서 듣고 있었던 겁니다. 신랑인 저도 수업을 듣듯이 집중을 하고 있었습니다.

주례의 내용은 결혼식과는 사뭇 맞지 않아 보이는 역병(疫病)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선생님 고향에 어릴 때 역병이 돌던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내셨습니다. 선생님의 할머니께서는 마을에 역병이 돌자 손자인 선생님과 동네 아이들에게 오래 삭은 군내 나는 김칫국을 먹였다고 합니다. 냄새도 역하고, 맛도 고약해서 모두 진저리를 쳤다고 합니다. 당연히 선생님은 할머니를 원망하였고, 친구들에게도 미안한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김칫국을 먹은 아이들은 역병에서 무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선생님의 어깨가 으쓱해지셨겠죠. 오래된 김치에는 놀라운 치유력이 있나 봅니다. 저희의 결혼 생활도 오래된 김칫국물처럼 삭히고 삭히면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다는 말씀이셨습니다. 힘든 일도 있겠지만, 서로를 위하는 마음으로 오래 같이한다면 못 이겨낼 일도 없겠지요.

예전에는 전염병은 정말로 두려운 일이었을 겁니다. 예전에 무서워하던 ‘호환(虎患), 마마’라고 할 때 마마도 천연두(天然痘)를 가리키는 전염병입니다. 흑사병(黑死病)으로 유럽은 인구의 3분의 1이 사망하였습니다. 정말 엄청난 사망률입니다. 1차 세계대전 무렵에는 스페인 독감으로 1200만 명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상상하기 어려운 숫자이며,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이었을 겁니다. 예전에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형제 중 전염병으로 세상을 뜬 경우도 많습니다. 저희 어머니도 동생 둘이 같은 날 전염병으로 세상을 떴다고 합니다. 할머니, 할아버지의 고통을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중국 무한에서 시작된 신종 폐렴은 무서운 속도로 전염되고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이미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고, 고통 속에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계속 확진된 환자가 늘고 있으며 공포와 불안이 사람들 사이에서 일상화하고 있습니다. 작은 기침 소리에도 놀라고, 두려워합니다. 어쩌면 전염병보다 무서운 것은 혐오(嫌惡)가 아닐까 합니다. 혐오도 전염이 됩니다. 지금 전 세계에서 중국인에 대한 혐오, 동양인에 대한 혐오가 넘쳐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혐오의 주체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혐오의 대상이기도 합니다. 혐오는 불안과도 이어집니다. 불안한 마음이 혐오를 부추기는 겁니다. 그리고 불안은 다시 우울함으로 전염됩니다. 세상이 더 어두워지고 있습니다.

집으로 가는 길, 한 대학 정문에 붙은 플래카드를 보았습니다. ‘중국 힘내요, 무한 힘내요’라는 말이 중국어로 쓰여 있습니다. 두렵고 불안하겠지만, 그럴수록 사람에 대한 따뜻함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가족이 죽거나 아프고 여기저기서 차별을 당하고 있는 이들에게 따뜻한 눈빛, 말 한마디가 힘이 될 겁니다. 우리의 따뜻한 정에도 놀라운 전파력이 있으니까 말입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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