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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바람 부는 날 무릎을 꿇다

어느 해 늦은 봄, 바람이 제법 불던 아침나절, 백담사에 들렀다. 도보 국토횡단 중이었다. 다리를 건너 경내에 들어섰다. 만해 선생 흉상 앞에 한참 서 있는데 어디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날렵하게 치켜올라간 처마 끝 작은 종이 댕그렁 댕그렁… 풍경소리로 길손을 반겨주었다. 풍경은 어느 쪽 바람인가를 시비하지 않고 센 바람 여린 바람을 가리지 않는다. 온 힘 다해 울려 퍼지는 종소리를 나도 온 몸 열어 받았다.

법당에 들어섰다. 자비로운 미소로 맞아주시는 부처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한 줄기 바람이 촛불을 가볍게 흔든다. 중생들이, 제각각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쓰다듬어 주기를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불상 앞에 쪼그려 앉아있다. 풍경소리가 그들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지나간다. 땀내 나는 등을 토닥거리며 건너가시는 종소리를 나도 한 마리 짐승이 되어 다소곳이 받아 모셨다.

그날도 바람이 불었다. 스페인 산티아고 2천리 순례길을 걸어가던 중이었다. 멀리 성당이 보였다. 초라하고 낡은 다 삭아 쓰러져 가는 오래된 작은 건물이었다. 지친 다리를 끌며 삐걱이는 문을 열고 들어가 무릎을 꿇었다. 한동안 말없이 앉아 있었다. 바람에 문짝이 덜컹거렸다. 내 지나온 날들이 활동사진 필름처럼 스쳐지나갔다. 힘들고 어려웠던 고비고비 웅크리고 앉아있던 내가 보였다. 가여운 녀석. 울음이 터져 나왔다. 숨죽이며 한참을 울었다.

그때 어디서 가느다랗게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울음을 삼키며 우는 소리였다. 가만히 귀 기울여보니, 내 울음소리와 닮았다. 오래 전 내 아들이 골방에서 혼자 흐느끼며 울던 날, 아비인 나도 저렇게 숨죽이며 따라 울었던 적이 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다시 귀 기울여보니 옛날 옛적 우리 아버지 울음소리 같기도 하다. 아버지, 우리 아버지, 하느님 우리 하느님, 여기까지 따라와 저를 위해 울어주시다니요.



오늘, 태평양 바라보이는 언덕에 서서 바람을 맞는다. 바람이 온몸을 휘감는다. 아차하면 날려 갈 것만 같다. 바람 앞에 인간은 바람이 된다. 바다 속의 모든 것이 바닷물에 덮여 바다가 되듯 바람 속의 만물은 바람이 되어 펄럭인다. 깃발이 되어 일어선다.

이 바람은 태평양 건너 내 조국에서 불어오는 바람이다. 바람결에 교회당의 맑은 종소리가 실려 있고 둥둥둥 산사의 북소리도 울려온다. 저 바람 속에 사람들의 아우성이 들어있다. 피비린내가 묻어있고 분노가 서려있다. 바람 따라 신음 소리가 들려온다.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소리가 끊어질 듯 이어질 듯 바람 타고 넘어오고 있다.

파도가 밀려온다. 물보라를 일으키며 날을 세우고 달려온다. 손에 손을 잡고 어깨동무를 하며, 끌어주고 밀어주며 수만리 길을 달려온 파도. 백사장 위에 철석 몸을 부려 거품으로 사라진다. 거품. 흔적도 없이 서서히 스며드는 거품을 가만히 바라본다. 저만치 장의차 행렬이 지나간다.

바람이 거세다. 백담사 풍경소리가 들려온다. 산티에고 길의 울음소리도 들린다.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


정찬열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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