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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칼럼] 꼰대라테

대한민국은 현재 트로트 열풍이다. 1990년대 댄스열풍, 2000년대 힙합열풍에 ‘한물간’ 음악으로 치부되던 트로트가 작년과 올해 대한민국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오디션 경연프로그램으로 시작된 열풍은 그야말로 남녀노소 불문하고 트로트에 빠져있는 듯 하다. 종편 프로그램 뿐만 아니라 지상파 방송 프로그램도 트로트 관련 프로그램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웬만한 인기 드라마 시청률을 월등히 압도 하고 있다.

뭔일인가 싶어서 찾아보다가 귀에 딱 꽂히는 음악이 있었다. ‘꼰대라떼’. 직장인들의 필수음료(?) 커피 마시는 습관을 빗대어 직설적이지만 거슬리지 않는 표현으로 직장상사의 ‘꼰대’짓(?)을 재치있게 표현한 가사말이 재미있다. “왕년에 내가 말하신다면 오늘도 시작이구나 니까짓게 뭘알아 궁금하시면 라떼를 한잔 드세요”

‘꼰대’ 혹은 ‘꼰데’라는 말은 본래 아버지나 교사 등 나이 많은 남자를 가리켜 학생이나 청소년들이 쓰던 은어였으나, 근래에는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이른바 꼰대질을 하는 직장상사나 나이 많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의미가 변형된 속어이다(출처, 위키백과).

노랫말 가사의 후렴은 ‘라떼라떼라떼라떼 라떼는 말이야’를 반복하며 기성세대의 ‘나 때는 말이야’를 언어유희 기법으로 재미나게 표현했다. 듣기는 좀 거북하지만, 부드러운 라떼커피 감성에 담아 유하게 표현하지만, 그래도 할말은 하고마는 신세대의 감성을 듬뿍 담고 있다.



개인적으로 이런 류의 언어유희를 좋아한다. 잘하지는 못하지만, 듣고 있으면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생긴다. 그런데 가사를 듣다가 문득 ‘나 때는 말이야’가 익숙한 표현임을 알게 되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꼰대가 되버린 걸까?

며칠 전, 한국에 있는 지인에게 안부를 묻는 카톡을 보냈다. 이상기후의 영향으로 전세계가 폭염과 폭우로 몸살을 앓고 있는데, 대한민국에도 최근 몇일 동안 이어지는 장마로 인해 비피해가 심각하다는 뉴스를 들었다. 서로의 안부를 묻던 중, 지인의 아들이 이틀 전에 군에 입대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지인이 묻기를, ‘나 때는 군대를 얼마나 갔었냐’고 묻기에, ‘나 때는 28 개월 복무했다’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아들 아빠랑 똑같은 소리 한다며 나이를 먹더니 꼰대가 됐다고 놀렸다. 지인이 아들 아빠에게 물으니, 나 때는 30 개월을 복무했고, 개인 소지품은 하나도 소지할 수 없었고 지금은 군대도 아니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남자는 군대 얘기만 나오면 다 꼰대가 된다. 마치 큰 영웅이나 된 것처럼 입에 거품을 물고 얘기 보따리를 풀기 시작된다. 물론 다 그렇지만은 않다.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레 옛날을 추억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 때는 그랬던 것이 지금도 여전한 것이 있고, 그 때는 그랬지만 지금은 아닌 것이 있다. 옛날에는 당연했던 것들이 이제는 당연하면 큰일나는 경우도 있다. 미국의 인종차별 반대시위를 확산시킨 플로이드 사건이 대표적인 경우다. 그때는 당연했지만, 지금은 큰일난다. 변화된 시대를 바라보며 지나간 시간을 회상하면 자연스레 꼰대화법이 등장한다. 옛날엔 안그랬는데, 나 때는 말이야, 내가 학교 다닐 때는 말이야, 왕년에는.

어느 누구도 꼰대짓을 하고 싶어서 하는 건 아니다. 자기 기준으로 봤을 때 그때는 그랬었다고 말하는 것 뿐이다. 그렇지만,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옛날과 지금은 비교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상황이 변했고, 관점이 변했고, 시대가 변했기 때문이다. 옛날 옛적 그 시절을 경험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공감대가 형성될 수 없다.

지나온 전통과 기억은 무조건 무시되면 안된다. 무시할 수도 없다. 그러나 강요되어서도 안된다. 옛날에 어려웠던 순간을 헤쳐 나온 기성세대의 지혜와 용기가 지금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자신의 경험만을 이야기 할 것이 아니라, 그리고 그 경험과 지식을 강요할 것이 아니라, 지금의 어려움을 함께 고민하고 용기를 북돋워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새로운 문화와 경험이 창출 된다. 새로운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다. 기성세대의 전유물로 취급받던 트로트가 EDM(Electronic dance music)과 만나 ‘아모르파티’와 같은 열풍을 일으켰던 처럼 말이다.

영적 꼰대도 있지 않을까? 옛날에 받았던 은혜만 생각하고 지금을 살피지 않으면 영적 꼰대일 수 있다. 받은 은혜를 유지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날마다 새롭게 되어야 한다. 왕년에 성령충만하고 예수 잘 믿은 것은 분명 좋은 기억이다. 그러나 지금 그렇지 않다면 문제다. 왕년에 성령충했던 기억이, 예수 잘 믿은 기억이 천국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 지금이 중요하다. 오늘 성령충만해야 하고 오늘 예수 잘 믿어야 한다. 예수 믿기 이전의 옛사람은 이미 죽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죽는다. 어제의 나는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 날을 허락 받아 날마다 새롭게 살아간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한다.

문화평론가들의 글을 살펴보니 트로트에는 한국고유의, 조금 더 넓혀서 동양문화의 문화적 DNA가 있다고 한다. 시대가 변하여 사라질 것 같지만 침체기가 있을 뿐 없어지진 않는다고 평가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영적 DNA가 있다. 예수님을 나의 주로 인정한 순간 그동안 죽어있던 영적 DNA가 깨어난다. 상황과 문제 속에 잠시 희미해져 방황할 때도 있지만, 결국은 주님을 찾아와 엎드려 기도한다. 한번도 예수 믿지 않던 사람들조차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주님 앞에 나와 도움을 청한다. 우리 안에 영적 DNA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영이 본래부터 존재하던 영적DNA를 깨워 주님을 찾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기성세대나 새로운 세대나 한번도경험해 보지 못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과거의 경험과 지혜가 필요할 수도 있고, 새롭게 갱신되어야 할 부분도 있다. 강요하는 자세도 문제지만, 무조건적 거부도 문제다. 과거의 전통과 지혜에 새로운 시각과 신기술이 조화를 이룬다면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문화를 창출할 수 있다.

교회도 코로나 사태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러나 시각을 달리해보면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 과거의 전통에 묶여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들이 새롭게 열리고 있다. 초대교회 시절, 큰 핍박으로 교회가 뿔뿔이 흩어졌다. 사건 자체로만 본다면 교회에 큰 위기였지만, 흩어진 성도들이 흩어진 그 자리에서 믿음을 지킴으로 더 많은 교회가 불같이 일어나 이곳 저곳에 동시다발적으로 부흥이 일어났다. 합력하여 선으로 바꾸시는 놀라운 성령의 역사였다. 또한 중세시대 교황을 중심으로 했던 서방교회의 면죄부 판매와 연옥설 교리, 교권주의에 대항하여 종교개혁이 일어난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성령의 역사였다. 어쩌면 오늘 이후의 역사는 코로나 이후의 시대를 가리켜 종교개혁의 시대로, 혹은 대 변환의 시대로 평가 할지도 모른다.

과거에 집착하기 보다는 과거로 부터 얻을 교훈에 집중하고, 오늘의 어려움에 두려워하기 보다는 돌다리도 두드리는 심정으로 용기를 내어 도전해야 한다. 어쩌면 영원히 변치 않으실 예수님과 변함없는 주의 말씀을 제외하고 모든 것을 다 바꿔야 할지도 모른다. 지나온 시간 성령의 역사로 이어온 좋은 전통들을 바탕으로 다시 도약하는 시대, 다시 부흥하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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