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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태양 빛, 그 쓸쓸함에 대하여

한여름의 태양 빛으로 과거를 기억하는가. 작년 여름 한국에서 만난 한낮에 쨍한 여름빛에서 내 성장기의 어린 시절의 권태와 무료함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그 느낌은 오랫동안 미국에서 느껴보지 못한, 빛이 주는 충격이었다. 고스란히 그 시절로 돌아가 조그만 소녀가 외갓집 대청마루에 앉아 있다. 한낮의 태양 볕이 기와지붕 위를 허락 없이 지나가며, 마룻바닥에 만들어내는 그늘의 흔적들을 바라보고 있다. 아마도 여름 방학이란 소통의 부재와 시골의 적막감에 적당히 지쳐 있을 즈음이었던 것 같다.

그때는 태양 속에 갇혀 더위에 굴복하는 듯한 나른한 여름이 싫었고, 자극 없이 어리기만 한 내 시간은 더 싫었다. 그저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심심하면 방학 숙제라도 하라고 채근하는 엄마는 얼음 띄운 미숫가루를 미처 다 풀지도 않고 덩어리진 채로 국그릇에 한 대접 만들어다 주셨다. 그러다 동생들과 뱀 주사위 던지기 게임을 하든지, 종이에다 어깨 뽕을 살린 공주 옷을 그려서 영혼을 부여한 종이 인형을 행복하게 하는 놀이를 했다.

무료함의 유일한 탈출구였던 상상력은, 종이 인형이 내가 꿈꾸는 미래의 나였다. 마음에 드는 색깔로 옷도 골라 입고, 핸드백과 가운데 왕방울만 한 보석 달린 진주 목걸이도 많이 소유하고 마음껏 선택했다. 종이에 그리면 다 내 소유가 되는 핑크빛 세상이 미래에 펼쳐질 줄 알았다. 지글거리던 햇볕이 낮에 부린 횡포를, 서쪽으로 허리를 꺾으며 사죄할 때쯤, 평상에 상을 놓고 오이와 미역이 사이좋게 들어간 새콤달콤한 오이 냉국과 함께한 저녁을 먹었다.

고국의 여름 태양은 기왓장 사이에 피어나는 풀잎처럼 어린 시간으로 나를 소환하며, 늙지도 않고 그대로였다. 미숫가루 먹기 싫다고 투정부리던 그 소녀는 노모의 곁을 떠나 멀고 먼 타국에 있다가, 풀어지지 않은 미숫가루 덩어리에 목이 멘 듯한 모습으로 엄마의 사망선고와 함께 돌아왔다. 엄마 없이 고향의 태양과 독대한 내 생에 첫 여름이었고, 그 뜨거운 쓸쓸함에 주저앉고 싶었다. 그때의 태양 빛은 관념화된 슬픔으로 더위에 지친 불투명한 기억만을 두드렸지만, 사실 난 누구보다도 삶에 보석을 꿈꾸었던 잠재된 욕망 여자였음을 고백해야 한다. 또 내 안에 갇혀서 내리사랑만 할 줄 아는 팽배한 이기주의를 고백해야 한다. 내가 꿈꾸었던 핑크빛 세상에 엄마는 없었다고, 솔직하게 엄마의 영혼에 고백해야 한다.



엄마는 늘 돌아와서 같이 살자고 하셨다. 왜 얼굴도 못 보게 멀리 가서 살고 있느냐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그런 건 모성의 본능인 짝사랑이라고 애써 무시했고, 엄마의 내리사랑을 모르는 척했다. 그리고 일 년 뒤쯤 아들애가 대학을 졸업하면 그때는 엄마하고 잠깐이라도 살아야겠다고 생각만 했다. 그 생각이라도 말씀드려서 기뻐하는 모습을 선물하지 못한 게 가슴이 아팠다. 뫼비우스 띠에 갇힌 불효를 겪어 보고서야 소강상태에 놓인 인간의 어리석음을 알게 됐다.

태양의 질서가 품고 있는 삶과 죽음 중 그 죽음에 대해서, 인간의 영혼이 가는 곳이 어디일까 하는 궁금증이 화두가 됐다. 그리고 처음으로 죽음이 평화로 다가왔다. 그곳은 밝은 빛의 태양과 내 엄마가 계시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원경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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