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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흔들리지 않게

아침 햇살을 맞으며 나선 산책길. 공기가 써늘하다. 오늘따라 하늘은 깊어 보였다. 가을이 오려나 보다. 쉬던 직장 일을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오늘처럼 쉬는 날이 소중하다. 무엇에 쫓기듯 걷지 말자, 자신에게 다짐을 한다. 설렁설렁 이곳저곳 쳐다보며 천천히 걷는 여유는 참 좋은 것이다.

호박 덩굴이 담장을 넘어 꽃을 피운 집 앞을 지나간다. 계란을 사러 식료품 가게로 가는 중이다. 나무를 가득 덮은 담쟁이 잎들이 흔들거리며 날 아는 척한다. 참새들이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가 푸드덕 날갯짓하며 가지 위로 날아오른다. 아늑하고 호젓한 공간이지만 자주 오게 되지 않는다.

일상에서는 좀처럼 조용한 곳을 맞이할 마음이 안 생긴다. 급할 때일수록 오히려 큰길로 걸음을 재촉하게 되니 내 마음을 알 수 없다. 돌아오는 길에 대추나무가 보였다. 아직은 푸른 열매를 잔뜩 가슴에 안고 있다. 머지않아 붉게 익어갈 것이다. 저 나무는 기다림을 품고 있겠지? 엉뚱한 생각을 하며 안 가본 길로 들어선다. 언젠가는 가보려 마음을 먹었다.

철도 옆으로 난 좁은 길을 따라가다 꺾어져 모퉁이 집을 돌았다. 그 집 해바라기가 유난히 커서 꽃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 사마귀 한 마리가 꼼짝도 않고 다리를 치켜들고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모습이다. 나만 간직한 달콤한 비밀을 본 듯 가슴이 뛰었다. 집에 오는 걸음 내내 흐뭇하였다. 내 마음에 깃든 빛은 무슨 색깔일까? 파란 여름빛일까? 아니면 구름처럼 포근한 상아색 빛일까?



계절이 바뀔 때마다 난 자꾸 유치해진다. 아이들처럼 가슴이 부풀고, 가끔 슬퍼지고 또 뭉클해진다. 비현실적이 되는 것이 부끄럽지는 않다. 맨드라미가 피어있는 집에 봉숭아도 같이 피어있다. 집마다 피어있는 꽃이 다 다르다. 하지만 꽃을 심는 사람들 마음은 모두 예쁠 것이다.

코스모스가 길옆으로 가득 피어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짙은 보랏빛으로 그리고 분홍색. 흰색 혹은 주황색으로 피어있다. 여덟 개의 손가락을 펴고 바람이 부는 대로 흔들린다. 얼마나 살랑거리는지 우리 선조들은 살살이 꽃이라 불렀다. 금방 부러질 듯 흔들거리다가 금방 제자리로 돌아온다. 나무는 가끔 바람에 부서져도 이 꽃은 결코 그런 적이 없다. 아마 뿌리가 튼튼해서 그럴 것이다.

여름 끝날 무렵 매미 울음을 삼켜버리고 성큼성큼 피어 가을을 맞이한다. 조만간 어김없이 푸르른 잎들이 붉게 혹은 노랗게 물들어져 갈 것이다. 세상은 온통 바람이다. 모든 편견과 질병과 부패한 정치인들은 다 태풍 같은 바람이다. 살살이 꽃처럼 튼튼한 뿌리를 지녀야겠다. 내가 젤 좋아하는 한글단어 중 하나가 ‘삶’ 이다.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라고 말하고 있다. 뿌리처럼 사람과 사람의 사이가 촘촘히 얽혀서 서로 기대고 북돋우며 용서하고, 화합하고 하는 것이 삶이라고 말이다. 이제 우리는 모든 생각과 양심과 지성을 총동원해서 사회의 부조리와 추잡한 차별과 가진 자들의 무자비한 횡포에 맞서 싸워야 한다. 그래서 삶이라는 거룩한 언어에 부끄럽지 말아야겠다. 가지는 흔들려도 뿌리는 흔들리지 않게. 매정한 세상의 욕심과 무지와 협박과 공포 그리고 무심함에 흔들리지 않게. 약자에 대한 연민과 안타까움을 영양분 삼아 마음속에 든든한 사랑의 뿌리를 내렸으면 좋겠다.


고성순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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