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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우상숭배와 이단

개신교 신자 중 간혹 배타적인 사람들이 있다. 본당 사목을 할 때 마당의 성모상에 누군가가 흙칠을 한 적이 있다. 열성 개신교 신자 짓이란다. 가톨릭의 우상숭배에 대한 경고라고. 그냥 종교적 치기려니 하고 지나쳤다. 그런데 신자가 아니라 신학자 중 유사한 생각을 가진 이들이 있다는 것은 충격이다.

개신교 신학대학 교수인 어느 목사. 개신교 신자가 절에 손상을 끼친 것에 사과하고 보상금을 마련하려 노력했다. 불교와의 화합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을 한 것이다. 그런데 그 교수가 재직하는 신학대학에서는 그에게 감사장이나 표창장을 주기는커녕 그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심지어 교수직을 박탈했다고 한다.

아직도 우상논쟁인가? 아직도 절의 불상, 가톨릭의 성상을 우상숭배라고 단죄하는 일부 목회자들이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그들에게 묻고 싶다. 우상이란 무엇인가. 불교가 부처님의 상을 모시는 것뿐만 아니라 가톨릭이 예수의 상을 모시는 것, 성모상과 성인상을 모시고 기도하는 것을 싸잡아서 이단이고 우상숭배라고 하는 생각. 과연 옳은 것인가?

하느님의 모습을 유형한 상으로 만들지 말라는 구약의 가르침은 신을 형상으로 만들면 소유물화할 수 있다는 원시신앙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다. 그런데 이보다 더 중요한 또 하나의 가르침은 하느님의 뜻이 아닌 사적인 욕망을 신격화해서 섬기지 말라는 경고다. 포이에르바하는 교회가 가진 우상숭배적인 면을 지적한 바 있다. ‘신은 인간 욕구의 투사다’라는 그의 말처럼 사적인 욕구를 신격화하는 우상숭배가 정말 문제인 것이다. 구약의 모세가 대노한 금송아지가 바로 현대의 우상숭배다.



하느님의 뜻은 사람을 존중하고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이다. 하느님이 아버지이기에 자식들이 서로 도와가며 싸우지 않고 살기를 바라신다. 그래서 이웃 사랑이 성경에서 누누이 강조된다. 그런 의미에서 불교계를 보라. 그들은 부처님의 자비하심을 실천하는 사람들이다. 우상숭배자나 이단이 아니라 세상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절에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불자들이 복음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선한 삶을 사는 불자들은 절에 모셔둔 부처님상을 보며 자신들도 따르고자 하는데, 그것을 우상숭배라고 할 수 있을까? 가톨릭에서는 이런 선한 사람들을 이단이라 하지 않고 익명의 크리스천이라 한다.

가톨릭교회에서는 살기 힘든 오지에 오로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러 간 사람들이 많다. 수단의 이태석 신부뿐만 아니라 수많은 봉사자들이 열악한 환경에 사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떠났다. 그런 그들이 마음으로 의지하고 기도할 때 사용한 것이 누군가는 우상이라고 하는 작은 성물들이다. 이들이 그 성물로 기도하고 위안을 받는 것을 우상숭배라고 할 수 있을까? 내적인 의미는 간과하고 눈에 보이는 형체에만 집착한다면 그것은 또 하나의 유물론이자 자기 기만적인 종교사기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 손으로 만든 것을 가졌느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 마음이 향한 곳이 어디인지가 더 중요하다.

현대에도 모세를 분노하게 하는 우상숭배자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기도시간보다 헌금 내는 시간에 가장 기뻐하는 목회자들, 신도들을 하느님의 백성이 아니라 ‘머리 당 얼마’ 하며 수입원으로 생각하는 목회자들. 이렇게 금송아지를 숭배하는 자들이 우상숭배자고 이단이다.

개신교에는 훌륭한 목사님들과 신학자들이 많은데, 그런 분들이 박해당하는 것을 보면 경제학자 그레셤의 법칙이 생각난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법칙. 질이 좋지 않은 사람들이 조직의 주도권을 잡으면 그 조직은 오염되고 서서히 무너져버린다.

가톨릭이 부패한 과거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존재하는 이유, 신자들이 교회를 떠나지 않은 이유는 금송아지를 섬기는 부패세력과는 반대로 오로지 하느님의 뜻을 따라 가난과 정결, 순명정신으로 엄격한 삶을 산 개혁수도회의 수도자들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도 가톨릭교회는 수도자적 삶을 사는 것을 신앙생활의 목표로 삼는 것이다. 개신교는 가톨릭의 부패를 비판하면서 생긴 종교다. 그런 개신교가 가톨릭의 좋지 않은 전철을 밟는 것은 반가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기도한다. 개신교가 진정한 종교개혁을 통하여 복음화의 동반자로 거듭나기를.


홍성남 / 가톨릭 영성심리상담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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