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기사공유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
  • 공유

[시로 읽는 삶] 가을, 아포리즘

자연은 신이 쓴 자서전 같다 지나온 길 구불텅해 산바람이 마을까지 따라온다 나보다도 더 오래 길 위를 헤맨다 헤매는 누구라도 길을 잃은 것은 아니다 너는알았구나 어떤 최고봉도 하늘 아래 있다는 걸 알았구나 오늘따라 산세가 더 잘 보인다 낮은 산이라도 봉우리 보여주고 높았다 낮았다 다시 솟아오른다 정상! 추락할 때마다 우린 정상을 꿈꾸었지 꿈이 있다면 정상은 언제나 꿈꾸는 자의 것이다

-천양희 시인의 ‘자연을 위한 헌사’ 부분



“자연은 신이 쓴 자서전 같다”라는 구절을 “자연은 신이 쓴 자서전이다”라고 읽는다. 공감도가 높은 글을 읽을 때의 일방적 독해법이다. 자서전은 스스로의 족적을 서술하는 일, 되어진 일들의 기록일 터여서 사실에 대한 구체적 진술이다.



자연은 신이 만든 작품이다. 진화와 퇴화를 거듭하면서 다소의 형질 변화가 있을지언정 애초 하나님의 창조물이었음을 의심치 않는다. 자연의 행간에서 얻어낸 지혜는 철학이 되기도 하고 문학이 되기도 한다. 자연은 어떤 말도 하지 않지만, 가르치려 하지 않지만, 벼랑 끝에 혹은 구름의 어깨 위에 세상의 이치를 숨겨 놓고 찾는 이들에게 보여준다.

올해는 일교차가 커 단풍이 어느 때보다 선명하고 예쁘다. 요즘 주변의 나무들이 눈부시다. 십수 년 맞이하는 가을이면서도 지루함 모르는 이 황홀함은 햇빛의 투사와 굴절로 채색되는 오묘함이기도 하지만 자서전이 전하려는 순환의 질서가 점점 더 이해되기 때문인 것 같다.

큰 나무는 큰 나무대로 작은 나무는 작은 나무대로 최선을 다해 살았을 것이다. 잎을 틔우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과정의 치열함으로, 단내가 나는 시간을 지나 이제 가벼워져야 할 때를 알고 나비의 춤사위로 떨어지는 낙엽은 가을의 아포리즘이다.

잡목 숲의 야생초들은 이름을 얻기도 했고 더러는 무명초로 누대를 살고 있을지라도 분을 내거나 동요 없이 씨를 내린다. 생존이란 눈물겨움이지만 그렇다고 노역은 아니다. 나고 죽는 일의 허무를 과장하지 않고 다만 오늘을 살아내는 슬기로움으로 대를 이어가게 된다.

누렇게 말라가는 잡초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여러 번 뽑히기도 했지만, 눈물 글썽이지 않고 결기로 맞서더니 바람의 이마를 짚어 온도를 알아채고는 고수의 해학처럼 땅에 눕는다.

누구나 정상을 향해 뛰어온 날들이 있었다. 정상은 어느 한 고지가 아니어서 다다르고도 알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애초 정상이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려오는 순간이 정상일 뿐이다. 매 순간의 발돋움이 정상이었다는 걸 알게 되는 건 순환의 과정을 거치고 나서다. 추락할 때마다 우릴 받쳐준 정상을 향한 갈망, 꿈꾸는 자의 몫이므로 정상은 언제나 홀로 거기에 있을 것이다.

가을은 목마른 이들에게 더 갈증을 주기도 한다. 지친 자들에게 더 피로감을 주기도 한다. 해는 짧아지고 다가올 겨울은 염려만 많아진다. 그러나 자연의 민낯은 우리에게 전언한다. 순환은 살아 있는 것들의 미덕, 생성과 사멸의 무한 반복으로 모든 존재가 가능하다는 것을.

노랗게 물든 이팝나무 아래 앉아 본다. 잠언처럼 떨어져 내리는 나뭇잎을 주어 본다. 자연은 그것이 무엇이건 의미이고 가치여서 어떤 우열도 둘 수 없다. 쑥부쟁이도 갈참나무도 똑같이 숭고한 시간을 거쳐 왔다. 폭우도 이슬도 발원지가 하나이듯. 저만의 색에 집중되어 가는 가을 숲은 익어가는 포도주처럼 향긋한 취기가 돈다.


조성자 / 시인



Log in to Twitter or Facebook account to connect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help-image Social comment?
lock icon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