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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가을빛에 허물을 씻으며

은퇴할 나이가 지났지만 난 아직 일을 한다. 시간을 줄이고 주말을 온전히 내 시간으로 가질 수 있어서 별 다른 불평은 없다. 디자인을 전공한 아들에게 35년 일궈온 사업을 물려 주고 이젠 아들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다. 우리는 한팀이라는 아들의 말이 기특해 등을 두드려주었다.

주말 새벽은 기다려지는 시간이다. 가능한 욕심을 부려 이른 시간에 알람을 맞추고 잠자리에 든다. 아직 하늘은 짙은 푸르샨블루. 알람보다 먼저 눈이 떠진다. "좀 더 자~" 아내의 볼에 입술을 맞추고, 아내가 깰까 조심스레 계단을 내려온다. 먼저 George Winston의 December 피아노 연주곡을 튼다. 마른 공기를 타고 밀려오는 12월의 서정이 애달프다. 커피를 내린다. 알싸한 커피향이 집안 가득 퍼진다.

하늘이 밝아올 무렵, 가까운 언덕으로 나간다. 깊게 숨을 들이 마신다. 하늘이 내안에 가득해 날아갈 것 같이 가벼워진다. 바람은 내 등에 손을 얻으며 물었다. "어디로 가고 있어요?" 젊은 시절 늘 시간에 쫓겨 살았다. 하고 싶은 일보다 해야 하는 일들로 나의 시간은 채워졌다. 포기라는 생각을 할 여유조차 없었던 것 같다. 엎어지면 코 닿을만큼 가까운 언덕을 걸어야겠다는 생각은 사치였다. 붉게 물들었던 단풍을 바라보지도, 긴 구름띠 아래로 번지는 보랏빛 노을을 눈여겨 보지도 못했다. 그 많은 들풀의 애틋함도, 들꽃들의 웃음도, 바람의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실패한 자라 스스로 낙인 찍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나를 더 깊숙히 감췄다.

바람에 밀려 눈이 날린다. 그러나 가을은 쉽게 그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다. 눈부신 가을빛 속엔 두 번이나 꽃 피운 숲이 자랑스럽다. 낙엽을 떨구며 나무는 아팠을까? 어떤 마음 있었을까? 나무는 나보다 한 수 위 고단자임이 분명하다. 겹겹이 입은 옷을 벗지 못하는 우리에 비하면, 추운 겨울 닥치기 전 제 옷을 스스로 벗어버리고 의연히 버티고 선 나무는 나의 선생이다. 또 나의 기도이다.



스스로에게 실패자란 올가미를 씌웠던 사람들이여! 그 깊은 어둠, 그 이상했던 정적 속에서 벗어나자. 가을빛에 우리의 허물을 널자. 오랜 시간 지워지고 덮어진 그 길 위에 다시 서자. 우린 언제나 이 넉넉한 가을 숲에서 햇빛 가득한 포도당 한 링겔로 다시 세워질 수 있지 않은가. (시카고 문인회장)

가을빛에 허물을 씻으며

춤 추거나 노래 부르지 않았다
낙엽은 어느 새 떨어져 발 밑에 뒹굴었고
우린 말 없이 서로의 길을 걸었다

실패한 자여, 가을 숲으로 가자
목마른 자여, 눈부신 가을빛에 물 들자
거기 가을 숲에서 우리의 걷 옷을 벗자
때 묻어 헹궈지지 않는 허물, 욕심
가을빛에 씻어 자족의 바람에 널자

낙엽이 쌓이고, 우리 시간도 쌓인다
무성했던 우리의 길도 덮힌다
이곳을 지나갔던 사람, 또 지나갈 사람
이곳을 모르는 사람들의 시간조차 퇴적된다

우린 어디로 가고 있는가
실패한 자만이 느낄 수 있는 깊은 어둠
그 어둠 언저리에서 길을 잃었던, 그 이상했던 정적
우린 오랜 시간 제 자리를 맴 돌지 않았나

잎이 꽃이 되어 다시 피는 가을숲
진홍의 설레임으로 겹겹이 입었던,
두려움의 껍질을 벗고 있다
바람이 불고, 여기는 붉은 가을 숲
햇빛 가득 포도당 한 링겔을 수혈 받는다


신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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