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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겨울, 그 인생의 날들

이상한 겨울날씨가 계속되고 있다. 초봄이나 늦가을이라고 해도 무관하리만큼 춥지 않은 날씨가 연일 이어지고 있다. 간간이 내리는 눈이 대지를 하얗게 덮어주지만 이내 녹아버리는 기현상이 몇주째다. 집에서 가까운 곳에 Deer Grove Preserves란 사람들이 자주 찾는 공원이 있다. 따뜻한 날씨에는 많은 사람들이 공원 내에 조성된 산책로를 걷기도 하고, 온가족이 나와 피크닉을 즐기기도 하는 곳이다. 애견에 후리스비를 던져 주며 운동을 하고, 손에 리모트 컨트롤을 들고 모형 비행기를 띄우는 사람들도 있다. 날씨가 따뜻한 주말엔 파킹랏에 차들이 가득해 되돌아가는 사람들도 종종 보았다. 그런데 겨울엔 텅 빈 파킹랏에 높게 하늘을 향해 뻗은 나무들만이 이곳을 지켜주고 있다.

한파가 몰아치던 어느 해 겨울, 이곳에 왔었다. 겨울 청아한 공기가 콧속으로 밀려 들어온다. 콘트라베이스의 저음이 저 멀리 군락을 이룬 나무들 사이에서 들려온다. 파이프 올겐의 드라이한 음들이 나무가지 사이로 불어 오는 듯하다. 멀리까지 확 트인 설경은 마음을 말끔히 씻어주기에 충분하였다. 나무가지마다 피운 눈꽃은 햇빛에 반사되어 쳐다볼 수 없을 만큼 황홀하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발 끝이 얼어오는 느낌을 받은 건 꽤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길도 없었다. 모든 것들이 눈 속에 덮혀 있었고 찬바람과 마주하며 곧게 뻗은 나무들만 그곳에 서 있었다. 넓게 펼쳐진 하얀 대지는 모든 것을 껴안고 있었다. 홀로 있다는 외로움이 함께 있고 싶은 그리움으로 바꾸어지는 동안, 나는 그곳에 나무같이 서 있었다. 아니 나도 한 그루의 나무가 되어 찬 바람을 맞으며 한겨울을 견디어내고 있었다.

시카고에 온 그 다음해 겨울 엄청난 폭설이 내렸다. 눈을 치우러 밖으로 나왔지만 허리까지 쌓인 눈, 차들의 지붕까지 덮어버린 난감함에 다시 집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며칠 고립된 동안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었지만 모두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미로처럼 눈을 파들어가며 길을 내 보았지만 속수무책이었다. 그런데 그 며칠동안 이상하리만큼 마음이 편했다. 내짐을 발 밑에 내려 놓으니 무겁게 누르는 고통은 사라졌다. 얼마가 지나 폭설의 악몽이 희미해진 그 다음해, 시카고 시장은 제설작업의 늦은 조치로 인해 시장직에서 물러났다.

겨울, 그 인생의 날들



인생의 날들도 이런 겨울날씨와 같지 않을까?
헤어날 수 없는 고통의 순간 속에서도 깊은 잠을 청할 수 있는 안식의 시간들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지나보면 어떤 어려움도 견딜만한 순간이었음을 깨닫게 된다는 것을. 격동의 시간도 지나고 햇살 비치는 따뜻한 봄날이 오리라는 것을. 그렇게 한파와 미풍을 맞으며 겨울이라는 한 계절을 지나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가 만일 생각한대로 살지 않으면, 우리는 어느새 살고 있는대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초봄 같은 겨울이든, 늦가을 같은 겨울이든, 아니면 한파와 폭설의 한가운데 있는 겨울이든, 우리는 일년의 한 계절을 지나가고 있을 뿐이다. 팔 벌려 하늘 향해 뻗은 나무들은 안다. 겨울날은 그리움이 눈처럼 날린다는 것을, 쌓이기도 하고 녹기도 하면서 더 깊어져 간다는 것을, 높이와 넓이를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이해하게 된다. 그리움은 하늘 위에서 보면 한가지 생각이라는 것. 한가지 색상이라는 것. 한가지 소리로 들린다는 것. 함부로 대할 수 없는 향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겨울, 그것이 바로 살아가면서 느끼고, 체험하고, 터득하고, 이해하고, 사랑하는 인생의 날들이라는 것을. (시인/화가)


신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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