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기사공유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
  • 공유

[윌셔 플레이스] 프레지던트 vs 대통령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평화, 이른바 '팍스 아메리카'의 원년을 1984년으로 잡는 학자들도 적지 않다. 로널드 레이건이 재선에 나선 해다. 그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레이건의 상대 민주당 후보는 월터 먼데일. 카터 대통령 시절 부통령을 지내 지명도도 꽤 높았다. 처음엔 쉽게 봤는데 만만치 않았다. 먼데일은 당시 극을 향해 치닫던 냉전을 대화와 협상을 통해 해결하겠다며 선제공격을 폈다. 표심이 먼데일 쪽으로 흔들리는 듯싶었다. 때맞춰 레이건 캠프가 회심의 카드를 내놨다.

'더 베어(The Bear)' 캠페인 광고다. 오프닝 멘트가 퍽 인상적이다. "숲속에 곰이 한 마리 있습니다. 누군가의 눈에는 쉽게 띄지만 다른 사람에겐 잘 보이지 않는군요."

곰은 캘리포니아의 상징인 그리즐리 베어. 나레이터의 묵직한 톤이 흐른다. "곰을 길들일 수 있다고 하는데 천만에요. 아주 위험한 동물이어서 미리 대처해야 합니다." 이어 한 남자가 등장하자 무서운 듯 뒷걸음질 치는 곰. 레이건의 사진이 화면을 꽉 채우며 자막이 나온다. "레이건, 평화를 위해 준비된 대통령."

곰이 소련을 의미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을 터. 협상을 벌여 소련을 길들이겠다는 먼데일의 발상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간접적으로 꼬집었다. 곰은 닥치는 대로 먹어 치우는 숲속의 포식자. 자칫 잡아먹힐 수도 있는데 대화를 하겠다니.



광고의 키워드는 '힘을 통한 평화'다. 강하고 위대한 미국만이 평화를 담보해준다는 레이건의 설득에 먼데일의 유화론은 동력을 잃고 곧 잊혀졌다. 그해 대선 스코어는 49대 1. 레이건은 50개 주 가운데 먼데일의 고향인 미네소타만 뺏겼을 뿐 전대미문의 압승을 거뒀다.

레이건의 전략무기는 다름 아닌 그의 조크. 핵폭탄 몇백 개보다 무섭다는 말이 나올 만큼 파워를 지녔다. 언젠가 그는 소련의 반체제 인사 탄압 및 열악한 인권 상황과 관련해 이런 농을 던졌다.

"미국인이 소련 친구에게 말을 건넸다. 나는 백악관 앞에서 '레이건, 지옥에나 가라'고 외칠 수 있다고. 대통령이라도 맘에 안 들면 욕할 수 있는 자유가 있으니까. 그래도 아무도 안 잡아가. 소련인이 되받았다. 나 역시 (모스크바의) 크렘린궁 앞에서 '레이건, 지옥에나 가라'고 외칠 수 있지. 당신보다 더 큰 목소리로. 잡아가기는커녕 (비밀경찰들이) 손뼉을 쳐주데." 기자들은 웃음바다에 풍덩 빠져 한동안 허우적대야 했다.

같은 평화라도 옛 로마의 '팍스 로마나'와 미국의 '팍스 아메리카'는 그 결이 다르다. 전자는 정복을 통한 평화의 추구다. 힘이 커지면 옆 나라부터 집어삼킬 궁리를 할 텐데 평화는 무슨. 점령당한 주변국들은 로마에 대항할 힘이 없으니 그저 입 닫고 가만있을 수밖에. '팍스 로마나'는 어쩌면 '강요된 평화'가 아닌가 생각이 든다.

반면 후자는 해방과 자유에 방점이 찍힌다. "고르바초프여, 당장 이 벽을 허물라." 레이건이 베를린 장벽 앞에서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게 외친 호통이야말로 '팍스 아메리카나'의 결정체다.

문득 레이건의 B급 영화배우 시절 얘기가 떠오른다. "자네 대통령 같은 거 해볼 생각 없나." 친구의 말에 레이건이 머리를 극적였다. "왜, 자네도 내 연기가 영 시원찮아? 자꾸 대통령이나 하라고 하게." 레이건의 장례식장에서 조지 부시 대통령이 추모사 도중 인용해 화제가 됐던 유머다. 세계 최정상급 조문객들도 웃음을 참느라 애쓰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혀 기억에 남는다. 이번 주말은 '프레지던츠 데이' 연휴다. 미국의 마흔 번 째 대통령인 레이건의 미소 띤 얼굴과 함께 촌철살인의 조크가 새삼 그리워진다.


박용필 / 논설고문



Log in to Twitter or Facebook account to connect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help-image Social comment?
lock icon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