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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원 칼럼] 30여 년 만에 다시 마주한 스승

일요일 저녁, 시카고 애국포럼이 마련한 이인호 교수 초청 강연회에 갔었다. 사실 '자유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주제보다, 30여 년 전 강의를 들은 대학 은사님을 한 번 뵙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자유인, 지식인으로 산다는 것의 정의에서부터 시작된 강연은 질의응답까지 2시간을 훌쩍 넘겼다.

팔순을 넘긴 노(老)학자의 모습은 30여 년 전 처음 만났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교탁에 팔꿈치를 올리고 마이크를 손으로 감싸 쥔 채 높낮이 없는 차분한 목소리로 자신의 생각을 풀어나갔다. 겉보기엔 40대 중반의 중견 교수에서 명예교수로 호칭이 바뀌었을 뿐이었다.

내 모습 또한 크게 바뀌지 않았다. 강연회장 뒷쪽 구석 자리에 앉아 이따금 내용을 메모하고, 잠시 다른 생각에 잠기거나 다른 이들의 모습을 둘러보곤 했다.

하지만 실내 분위기는 달랐다. 서울 관악산 아래에서 시카고 서버브로 배경이 달라졌고, 강연을 듣고 있는 이들은 20대 초반의 푸릇푸릇한 젊은이들이 아닌 60대 이상의 중장년층이었다. 겨울이 다가온 탓에 옷 색깔이 대부분 무채색이어서인지 분위기도 묵직하게 느껴졌다. 성적에 관계 없는 강연이어서 그런가 이따금 졸고 있는 이들도 눈에 띄었다.



옛 스승의 말씀을 듣는 내내, 30여 년 전 강의실과 교정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리고 마침 지난 주에 관람한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에 흐르던 음악들도 맴돌았다.

'보헤미안 랩소디'는 1970년 영국 런던에서 결성돼 지금까지 활동을 이어오고 있는 전설적 록밴드 퀸(Queen)의 이야기다. 영화는 1991년 에이즈로 세상을 떠난 리드 보컬 프레디 머큐리의 삶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솔직히 말하면 이 영화가 초점을 맞춘 머큐리의 사생활에 큰 공감을 하지 못하고, 내 기준으로는 극적 완성도가 높았다고 평가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영화가 끝난 후 엔딩 타이틀이 다 올라갈 때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퀸의 음악, 치열한 창작 과정과 열정적인 공연, 머큐리를 비롯 브라이언 메이, 로저 테일러, 존 디콘 등 각 멤버의 개성에 젖어보면서 아이러니하게도 퀸의 음악과 거리가 멀었던 나의 70~80년대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졌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 시카고 북서부의 한적한 교외 도시에서, 시국 강연에 나선 은사님을 마주하고 앉아 있자니 감회가 새로웠다. 군사 정권에 반대하던 젊은 제자들의 열정을 이해하고, 그들의 아픔과 분노를 조용히 감싸주던 진보 성향의 중견 학자 이인호 교수는 어느새 극우 역사학자, 보수 우파의 아이콘이 돼 있다. 은퇴를 하셨고 "이제 이 나이에 전면에 나설 수는 없지만…"이라는 말을 접두어처럼 사용했다. 그의 수업을 들으며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민족주의와 제국주의에 대해 묻고 고민하던 제자는 이국 땅에서 하루하루 일과에 묻혀 살고 있다. 스승과 제자, 가르침과 배움으로 연결돼있던 둘 사이는 공통분모를 찾기 어려운 관계가 됐다.

나를 스쳐간 세월이 내 생각과 가치를 알게 모르게 바꿔놓았듯, 스승의 지난 30여 년 경험이 지금의 생각과 가치를 형성했을 것이다.

1980년대는 언제나 어제 같다. 그 시절 사진으로 확인하는 사람이나 풍경은 낯설만큼 색이 바래있지만, 내 기억 속 80년대는 그리 오래 되지 않은 시절이다. 그러나 옛 스승을 바라보다 문득 세월을 실감했다. 스무 살 청춘이 서른이 되고, 마흔, 쉰, 예순, 일흔, 여든이 된다. 때로는 상처가, 때로는 성취가 세상을 보는 관점을 달라지게도 한다. 바뀌지 않는 가치도 있지만 많은 것들이 변해 간다.

“역사에는 사실과 해석이 존재합니다.” 30여 년 만에 다시 마주한 옛 스승이 남긴 한마디를 거듭 되뇌어본다.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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