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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 광장] 기다림으로 지켜낸 열매

다양한 민족이 어울려 사는 미국 사회에서 '어디 출신이냐?'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반갑다는 표현으로 자신이 아는 한국말 한마디를 던진다. 주로 '빨리빨리'라는 말이다. '부지런한 한국인의 국민성을 나타내는 말이겠지'라고 스스로 위로해도 다른 인종에게서 그런 말을 듣는 마음은 편치 않다. 겉으로야 웃지만, 속까지 웃을 수는 없다.

'빨리빨리'라는 말에 담긴 배려할 줄 모르는 조급함, 함께 일하는 다른 인종 동료를 다그치는 큰 목소리, 기다릴 줄 모르는 성급함을 들킨 것 같기 때문이다.

미국에 와 겪는 첫 문화적 충격이 기다림이다. 병원에서도, 관공서에서도, 놀이동산에서도 하다못해 마켓에서도 기다려야 한다. 마음 급한 이들에게 하염없는 기다림은 자신의 소중한 시간을 갉아먹는 낭비다.



그런데 그 기다림이 열매를 맺는다. 하나를 하더라도 정확하게 해야 함을 배운다. 오래 기다린 만큼 또 다른 기다림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매사가 분명해야 함도 배운다. 한참을 기다렸는데 사소한 하나를 빠트려 다시 기다려야 하는 낭패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다.

지난 화요일 실시된 '리틀 방글라데시 주민의회 구성을 위한 구역 획정안'이 압도적인 표차로 부결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편 투표와 더불어 투표소에 나와 자신의 권리를 행사한 한인들이 지켜낸 압도적인 승리라고 언론은 보도한다. 이번 투표로 지켜낸 한인타운은 그동안 경제 위기, 유가 급등, 4·29 폭동, 지진 등의 아픔을 딛고 만들어진 기다림의 열매다. 한인 이민자들은 이곳에서 땀과 눈물, 그리고 성실함으로 삶의 기반을 다졌다.

투표 시작 몇 시간 전부터 줄을 서기 시작한 한인들은 한인타운이 축소될 수 있다는 위기감 속에서 투표소로 나왔다고 한다. 한 표를 행사하기 위해 길게 늘어선 줄은 투표 마감 시간까지도 줄지 않아 결국 자정이 다 되어서야 투표를 마칠 수 있었다고 한다. 방송에 나온 이들의 얼굴에서는 투표를 위해 몇 시간을 기다렸지만 그래도 한인타운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했다는 자부심을 읽을 수 있었다.

이번 투표를 통해 한가지 배운 것이 있다면 '기다림'이야말로 우리를 지키는 힘이라는 사실이다. 내 한 표가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알아서 하겠지 하면서 포기한 투표가 얼마나 많았던가.

지난 화요일 한인들이 보여준 기다림이야말로 미국에 사는 동포들도 힘을 모으면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안겨준 계기가 되었다. 더불어 우리의 소중한 기다림의 열매를 지키는 것은 다름 아닌 '기다림'이라는 비밀을 깨닫게 해 주었다.

소설가 김훈이 자전거를 타고 전국을 여행하다 경기도 화성의 염전을 지날 때였다. 바닷물을 가두어 햇볕에 말려 소금을 거둬들이는 염전을 바라보다가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염전은 잡거나 기르지 않고, 캐거나 따지 않는다. 염전은 기다리는 들이다. 시간이 기르는 밭이다."

어디 염전만 기다리는 들이겠는가? 우리의 삶이 기다리는 들이다. 자식도 사업도, 가정도 모두 기다리는 들에서 자란 기다림의 열매다.

초기 이민자들이 차별과 조롱을 견디고 세운 한인타운,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어 잘살아 보겠다는 열정 하나로 일궈낸 한인타운, 남의 나라에 살면서 받아야 하는 설움을 참으며 기다림으로 맺은 열매인 한인타운, 그 한인타운을 '기다림'으로 지켜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다. 또 다른 기다림으로 숱한 기다림의 열매를 지켜내자!


이창민 / 목사·LA연합감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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