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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경 칼럼]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하는 이유

일과를 마치고 부랴부랴 집으로 가던 길에 잠시 마트에 들렸다. 저녁 준비를 하려면 며칠 전에 떨어진 간장을 사야 했다. 진열대를 찾아가니, 그 앞을 서성이고 있던 노신사가 도움을 청했다. 설명을 듣고 보니 그가 찾는 것은 가락국수 국물을 만드는 간장이었다. 골라 주면서 물을 배합해서 사용하는 법까지 알려주다 보니 거의 10분이 지체되었다. 서둘러 나오면서 “ 이 바쁜 시간에 간장 한 병 사러 왔다가 웬 오지랖이람.” 하며 혼자 웃었지만, 그의 지적인 모습과 말투에서 느꼈던 호감 때문에 생긴 과잉친절이었다.

누군가를 처음 만나면 마음속에 훅하고 느껴지는 ‘직감(直感)’이란 게 있다. 호감 아니면 비호감, 첫 만남에서 순식간에 생기는 이 느낌의 주체는 나 자신이므로 상대방 탓을 할 수는 없겠다. 그러나 무엇이라고 딱 끄집어낼 수 없는 이 느낌은 신기하게도, 관계를 맺은 후에 돌이켜 보면 상대가 좋은 사람인지, 가까이 할 수 있을 사람인지, 믿을 만한 사람인지 판단했던 첫 직감이 딱 맞아떨어질 때가 많다.

호감과 비호감 판단 과정은 0.1초밖에 걸리지 않는다는 미국 프린스턴 대학 심리학자의 실험 결과에 관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실험자들에게 사진을 힐끗 보게 하는 것으로 상대방의 호감과 비호감을 판단하는 방법이었는데, 시간을 더 늘려서 보게 했어도, 상대방을 실물로 보여 주었어도 그들이 직감적으로 내렸던 판단은 결국 바뀌지 않았고, 결국 애초의 판단이 맞았다는 확인을 했을 뿐이었다고 했다.

흔한 일은 아니지만, 입소 상담을 하다 보면 마음에 거부감이 생길 정도로 비호감을 주는 사람이 있다. 내 편견일 거라고 스스로 마음을 다독이며 절차를 진행하지만, 그런 경우는 언제나 다른 사람과 마찰이 생겼고 불협화음을 일으켰다. 처음 당했을 땐,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한시라도 빨리 퇴소시키는 것만이 최선책이었다. 그러나 생의 마지막을 편히 보내자고 찾아왔던 노인을 내보내야 한다는 죄책감의 스트레스가 너무 커서 나 역시 제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살면서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관계를 하루하루 버텨야 하는 것만큼 마음이 상하는 일이 또 있을까.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제각각 다른 노인들이 모여 사는 생활공동체에서 싫어도 얼굴을 봐야 하는 문제가 발생하면 모든 이의 삶은 아수라장이 되고 만다. 나 역시 울화통이 터질 것 같은 그 상황이 힘들어서 도망가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먹고사는 일에 발목이 잡혀 떠나지도 못했고, 행복하게 살고 싶은 마음은 너무나 간절했으므로 결국 내가 변할 수밖에 없었다.

정 할머니는 오 년 전에 양로원을 찾아오셨던 분이다. 웃음기라고는 좁쌀만큼도 보이지 않는 무표정한 얼굴을 처음 대했을 때 비호감의 느낌이 너무 강해서 어찌하면 입소를 거절할까, 핑계를 찾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할머니의 인생사를 듣고 나니, 가족도 없는 타국에서 60년 동안 지켜낸 할머니의 삶이 연민으로 보다는 경이로움으로 느껴졌다. 양로원에서 함께 생활한 지 한 달쯤 지났을 때였다. 할머니가 웃으며 말했다.
“ 난 태어나서 지금처럼 행복해 본 적이 없었어”라고.

호감은 유전적 인자가 아니라 후천적으로 습득하는 사회적 지능 같은 것이다. 호감은 체계적인 교육 없이 혼자서 습득할 수는 없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호감과 비호감의 내 직감을 믿는다. 그러나 이제는 직감의 용도가 달라졌다. 비호감이기 때문에 지레 피하려 하기보다는 단 한 가지라도 호감을 찾는 일에 초점을 맞추려 노력한다.

그렇다. 태어날 때부터 비호감은 없다. 로또에 당첨되면 몽땅 내게 줄 거라며, 화요일만 되면 가쁜 숨을 내쉬며 로또티켓을 사러 가는 정 할머니가 내게 주신 교훈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람은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한다고 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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