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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텃밭의 무법자

지난 여름 고추 밭에 풀을 뽑다가 보니 어린 시절 많이 보던 호박 비슷한 새싹이 올라오고 있었다. 아무도 심지 않았고 씨를 뿌리지도 않았는데 올라오는 이 생명을 차마 뽑아 버릴 수가 없어서 그냥 두고 보기로 했다. 뒤뜰이 햇빛이 적어서 지난 20년 동안 호박은 심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지난해 잔디 깎는 비토가 갔다 준 호박에서 나온 씨가 거름에 들어가서 겨울 동안 다른 것들과 함께 숙성하여 봄에 고추 밭 가운데 좋은 자리를 차지했나 보다. 그런데 호박은 하루가 다르게 자라서 옆의 이웃들을 힘들게 할 뿐만 아니라 생명까지도 위태롭게 하기 시작했다.

고추나 멕시칸 해바라기, 코스모스를 걸고 쓰러뜨릴 뿐만 아니라 고추 밭을 휩쓸고 다닌다. 뿐만 아니라 잎이 넓어서 조금 내려오는 햇빛을 혼자 다 차지하니 땅과 이웃을 온통 다 덮어 버리고 무법자가 되어간다. 식물이 평생을 한자리에만 서 있다는 말이 무색하다. 호박 잎의 지름이 20인치가 넘으니 고추나무는 안보이고 호박 한 그루가 다 차지했다.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는 호박은 아니고 어떤 종류인지 궁금해서 찾아보았더니 버터 넛 스쿼쉬란다. 급기야 남편은 뽑아버리라고 성화다. 그래도 이만큼 자란 것을 뽑아 버릴 수는 없어서 원해서 태어난 생명은 아닐지라도 이것도 엄연히 한 생명체임에는 틀림없다. 매일 아침 나 스스로 보안관이 되어서 불법으로 잡은 손을 떼어주고 호박이 가야 할 길로 가르쳐 주었지만 하루만 나가 보지 않으면 어느 사이 자기 멋대로 간다. 드디어 많은 가지가 벌어지고 꽃이 피기 시작했지만 이들은 스스로 좋은 시간을 맞추지 못하여 인공적으로 짝을 지어주기까지 했다. 호박이 열렸지만 다 떨어지고 겨우 호박 두 개를 성공해서 하루가 다르게 자라기 시작했다. 아까워서 따 먹지도 못하고 그냥 두었더니 바람이 심하게 부는 밤이면 생명의 줄을 놓지 말고 꼭 잡고 있기를 소리 내어 기도했다. 다음날 아무일 없었다는 듯 그냥 달려 있는 것을 보면 기특하기도 해서 양파 그물에 넣어서 달아두고 안심을 했다.

이제 어느덧 가을 마지막에 이르러 머지않아 서리가 내릴 때가 되었다. 그러나 이 호박은 완전히 익지 못하고 햇빛을 바라고 있다. 껍질이 반정도 누렇게 되어 마지막으로 한 뼘의 가을 햇살을 애타게 기다리지만 계절은 이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 여름 동안 넓은 호박 잎 때문에 고추를 맺어보지 못한 이웃들이 늦게나마 철없이 흰 꽃을 피워보지만 저들도 며칠 가지 못할 것이다. 골프장의 채색된 나뭇잎은 화려했던 시절의 소음을 꿈꾸며 숨 가쁘게 날리고 있다. 이제 이들의 시간은 지났다. 다 익지 못하고 계절에 쫓겨서 생명을 끝내야 했던 두덩이의 호박을 바라보면 나에게도 그 아쉬운 한 뼘의 햇살을 허락해 달라고 보이지 않는 분께 간청해보고 싶다. 일찍 포기한 길 잃은 마른 나뭇잎들은 동네 골목 구석구석을 구르고 있다.

일본에서 고대건축을 전문으로 다루는 니시오카 쓰네카즈 라는 유명한 궁궐목수의 지극히 당연하고 평범한 말을 옮겨볼까 한다. "자연에는 서두름이라든가 지름길 같은 게 없기 때문에 봄에 뿌린 볍씨는 가을까지 자라지 않고서는 열매를 맺지 못한다. 인간이 아무리 안달해도 자연 절기의 흐름은 앞당길 수 없고 늦출 수도 없다. 서두르면 벼는 여물지 않고 나무는 자라지 않는다." 방 구석에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덜 익은 호박을 보며 자연의 이치는 참으로 냉담하다고 생각한다. 며칠만 더 따뜻한 햇살을 허락해 주었다면 풍성한 가을을 맞이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자연 안에서 인간도 한 부분이라면 나무나 풀과 다를 게 없다는 말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이라는 (윤동주의 작품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지만) 시의 마지막 연을 옮겨본다.



내 인생의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어떤 열매를/ 얼마만큼 맺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나는 자랑스럽게 대답하기 위해/ 지금 나는 내 마음 밭에/ 좋은 생각의 씨를 뿌려 놓은/ 좋은 말과 행동의 열매를/ 부지런히 키워 가겠습니다


김동주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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