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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속에서] 산악인을 위한 '변명'

필자는 최근 네팔에서 사고를 당한 한국 산악인들과 친분이 깊었다. 그들을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상실감에 괴롭다. 사람들은 묻는다. 대체 저런 위험한 산을 왜 오르느냐고. 과연 산악인은 누구인가. 산악인은 삶과 사회의 본질적인 차이를 감지한다. 산악인은 죽음을 들여다 보며 삶의 무한한 가능성을 깨닫고 전율한다.

서울 북한산 인수봉 암벽을 오를 때의 기억이 새롭다. 그곳에서 내려다 본 거대한 도시. 건물과 아파트들 사이에서 우리는 그렇게 아옹다옹하며 살았던가. 수직의 세계에서 마침내 수평의 세계로 내려와 듬직한 땅을 딛고 섰을 때, 희박한 공기를 빠져나와 낮은 땅 짙은 공기의 향내를 맡는 바로 그때 산악인들은 찬란한 하루를 맞음에 감사하고 삶의 순간들은 조건없는 기쁨으로 채워진다. 그리고 묻는다. 봐라, 너의 삶의 시작은 어디인가. 직장, 가정, 학교, 가정, 만남, 미래, 뉴스, 스포츠, 음식, 건강 사이에서 반쯤 눈 감은 정신을 일깨우는 이가 바로 산악인이다.

등반은 단순한 '위험 놀이'가 아니다. 산악인은 첫째로 산을 오르는 이들이다. 산은 사람을 키우고 보듬는 인류의 어머니요 또 벌 주고 내팽개치는 혹독한 자연이다. 산악인은 산에서 삶과 죽음 사이에 놓인 인간 본성의 면면들을 걷는다. 먹고, 자고, 입고, 싸고, 메고, 오르고, 쉬고, 나누고, 사귀고 또 돌아온다. 초보 산악인은 '제대로 걷기'부터 배운다. 험난한 바위와 얼음, 벼랑과 설산을 누비게 해주는 것은 로프 다루는 잔기술 따위가 아니다. 몸과 마음을 자연과 일치시키는 오랜 수련의 결과다. 등반은 '산이 허락'해 주는 상태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등반은 '동양과는 이질적인 서구적 행각'이라는 지적도 있다. 역사를 모르는 얘기다. '산과 들로 나가 옳고 그른 것'을 깨우쳤던 화랑의 도를 어느새 잊었나. 물론 서양인들이 추켜세우는 등반형태와 철학을 무조건 추종하는 건 옳지 않고 또 오래가지도 않는다.



한국 산악 역사는 '성과주의'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돋보이는 성취에만 박수를 보내왔던 한국 근현대사의 축소판이다. 김창호 대장은 '산을 가기 위한 방편'으로 8천 미터 14좌를 완등해야 했다. 성과가 아닌 '등반 그 자체를 위한 등반'을 끊임없이 추구한 인물이다.

산악인들은 먼저 간 동료들을 죽는 날까지 잊지 못한다. 함께 희생된 네팔인들이 무슨 죄냐고도 묻는다. 네팔인을 동료로 여기지 않는 산악인은 없다. 하늘로 떠난 츠링, 상부, 푸르부 셋은 필자와도 연이 깊다. 네팔 외진 마을 닷새를 걸어 그들의 어머니가 홀로 계시는 산골 집에 찾아가 며칠을 묵기도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현지인은 희생만 하며…"라고 말하는 것은, 지난 백여 년 동안 고위험 직종을 개발하고 독점하여 외국인을 돕는 것으로 신분상승과 자부심을 동시에 얻어 온 히말라야 고산족의 끈질긴 주체성을 무시하는 '구제주의'적 시각일 뿐이다.


오영훈 / UC리버사이드 강사·인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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