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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쪼이나 쪼이나' 영옥이 언니

정초부터 여자 다섯이 모여 펜 드로잉을 배웠다. 한국서 온 여고 선배 영옥이 언니가 선생님이 되어 우리를 새로운 세계로 몰고 갔다. 딸 산후 조리차 미국에 왔다는 소식에 냉큼 마련한 배움의 자리다.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에 특유의 고음, 유난히 빛나는 눈빛. 수업을 마치고 집에 오면서 먼 옛날 여고시절을 생각한다.

여고에 입학하자마자 교지와 신문편집부로 차출되어 언니들을 따라 다녔다. 한 치수나 큰 교복을 어리버리 입고 다닌 1학년 여름방학이었다. 언니가 문예반 여름수련회에 무조건 가야한다고 했다. 그때 처음으로 해운대를 지나면 송정이고 더 내려가면 월내라는 조그만 시골 동네가 있는 줄 알았다. 우리는 기역자로 앉은 민박집을 통째로 빌렸다. 대청마루에 앉으면 싸리문 너머로 지나가는 행인을 볼 수 있었다. 오른쪽은 담 대신 남의 집 벽이었다. 그 벽의 창문으로 방안 누군가의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도착하자 우리는 흥분했다. 마음대로 요리해도 되는 널널한 시간이 꿈만 같았다. 카레라이스를 만들어 먹고 모래사장을 맨발로 걷고 오니 해가 졌다. 대청마루에 걸터앉아 '바닷가의 추억'을 시작으로 노래를 불렀다. 레퍼토리가 끝나갈 무렵 영옥이 언니가 나섰다. "내가 노래를 부를 테니까 '쪼이나쪼이나'하면서 추렴을 넣어라. 잉?" 우리는 쪼이나쪼이나 몇 번 연습창을 했다. "꽃같은 처녀가 콩밭을 메는데. 쪼이나쪼이나/ 나비 같은 총각이 대저 손목을 잡았네. 쪼이나쪼이나/ 나비같은 총각아 이 손목을 놓아라. 쪼이나쪼이나/ 호랑이 같은 우리오빠 대저 망보고 있노라. 쪼이나쪼이나."

한참 신이 났는데 갑자기 옆집 창이 왈카닥 열리며 남자 대학생의 얼굴이 나타났다. "가시나들아, 돼지 멱따는 소리 좀 그만해라. 잠 좀 자자." 열 명이 넘는 처자들 목소리가 얼마나 큰지 몰랐다. 우리는 얼굴을 가리며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르는데 영옥이 언니는 잽싸게 둘째손가락을 그에게 겨누었다. "나비 같은 총각아, 그 창문을 닫아라." 쪼이나쪼이나 합창은 자동으로 나왔다. 마루가 무너져라 뒹굴며 웃는데 싸리문 너머로 그 대학생이 나타났다. 그런데 모습이 가관이었다. 긴 런닝셔츠 아래로 바지는 안 보이고 벌거벗은 두 다리만 보였다. 마치 아랫도리를 홀랑 벗은 코 찔찔이 꼬마아이 형국이었다. 씩씩거리며 들어서는 그를 보며 아이구, 팬티도 안 입고... 하며 난리가 났다. 남자도 자기의 아랫도리를 내려다보더니 킥 웃으며 냅다 도망을 갔다. 그 밤에 우리는 잠들지 않았다.



그때의 인연이 강산이 네 번도 더 변한 지금 다시 이어졌다. 야들야들 가늘게 엮이었던 것이 세월 속에서 여물었나보다.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난 소중한 선물이 되었다. 누군가와 함께 먼 추억 속 시간으로 돌아가서 나눌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한 여름 밤에 목청껏 불렀던 쪼이나쪼이나가 생생하게 들린다. 아무 생각 없이 헐렁거리며 지나온 시간이 지금 돌아보면 더없이 아련하고 그립다. 지금 무심코 스치는 인연도 또 먼 훗날 갑자기 찾아오는 '옛 인연'이 되어 줄 지 모르는 일. 내 곁에 있는 사람이 새삼 소중해진다.


성민희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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