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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뜨락에서] 한글과 나

우리가 가진 문화 중 가장 위대한 것이 한글이라 해도 반박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라의 힘이 없어 500년 동안 5만 자나 된다는 한문에 밀려 빛을 보지 못했고 현대에 들어와서도 51자나 되는 일본글에 밀려 괄시를 받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우리나라가 가난할 때 좀 더 잘 살아 보겠다고 우리들은 이민 백을 하나 들고 태평양을 건넜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십 여 시간을 지나 공항에 내리니 미국에 살아도 된다는 영주권인 파란 카드를 주었고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던 나라의 국민이 어느새 세계에서 가장 부자인 미국의 입양이 되어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살아야 하니까 영어를 필사적으로 배우지 않을 수 없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조국에 대한 섭섭한 마음도 있었습니다. 가난한 조국. 나에게 웃음보다는 눈물을 주었던 조국. 그래도 나는 세금을 착실하게 내고 군복무도 3년을 착실하게 하고 조국에 대한 의무를 다했는데 미국에 간다고 하니까 여권을 내고 비자를 내는데 그렇게 트집을 잡고 급행료를 요구하던 정부와 공무원들이 미웠습니다. 이제 미국에 와서 미국 음식 먹고 미국 환자를 보며 자식들을 미국에서 키우니까 완전한 미국인이 되자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한국뉴스를 볼 수도 없었지만 보려고 생각도 안 했습니다. 교회도 미국 교회를 다니면서 미국 교회의 집사가 되고 장로가 되면서 미국사회에 푹 파묻히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어쩌다 뉴욕시에 가서 오랜 친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친구는 짓궂게 브로드웨이 32가의 인천집 이라는 순대국 집으로 끌고 갔습니다.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나를 앉혀 놓고 순대국을 시켰습니다. 정말 오래간만에 순대국을 앞에 놓았는데 스피커에서 노래가 들려 나왔습니다. 불러 봐도 울어 봐도 못 오실 어머님을 원통해 불러 보아도 가슴 치며 통곡해도…나는 갑자기 어머님 생각이 났습니다. 떠나오는 공항에서 나의 손을 잡고 나의 손등에 눈물을 떨구시던 어머님…갑자기 나의 손등에 어머님의 눈물이 떨어진 것처럼 뜨뜻해지며 가슴이 아파 왔습니다. 나는 뚝배기 위에 눈물을 뚝 뚝 흘리며 맛도 모르고 순대국물을 입에 넣었습니다. 집으로 와서 머리를 베개에 묻고 어머님을 생각 했습니다. 가난한 살림을 살면서 우리 형제들을 키우느라고 고생하신 어머님. 다른 애들은 중학교만 졸업을 하고 직장에 다니면서 돈을 버는데 공부를 하겠다는 우리의 욕심을 꺾지 않으시고 뒷바라지 하시느라고 남들 보다 더 고생 하신 어머님. 치아가 나쁘셔서 식사를 잘 못하시는데도 내가 외과 전문의가 될 때까지 틀니를 해드리지 못 해 식사 후에 항상 속이 아프시다고 하시던 어머님이 생각나서 가슴은 아프고 눈물이 났습니다.



나는 다시 어머님 같은 한글을 찾았습니다. 뉴욕의 고려서점에 전화를 하여 한국 책을 주문하였습니다. 버리고 떠났던 탕자를 맞아준 부모님처럼 한글은 불평 없이 나를 맞아 주었습니다. 나는 한국 소설을 읽고 시를 흥얼거리고 한글로 수필을 썼습니다. 한국 수필은 나를 맞아주어 등단을 시켜 주었고 나는 열심히 글을 썼습니다. 그리고 모은 글을 책으로 내여 열두 권의 수필집을 출판하였습니다.

아무것도 몰랐을 때는 일본어를 해야 되는 줄 알고 우리말을 천대했고 철이 들고서는 가난한 나의 조국이 부끄러워 한글을 버렸습니다. 그러나 한글과 조국은 나를 버리지 않고 기다려주고 맞아 주었습니다. 이제 한글로 된 소설과 시를 읽고 한글로 글을 쓰면서 어머니의 집에 돌아온 것처럼 아늑함을 느낍니다.


이용해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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