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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뜨락에서] '지하철 풍경'

연두 잎이 새롭게 태어나는 것을 보며, 삶에 신선한 바람과 향기가 작은 뜰에도 새 봄이 오는 소리 속삭이듯, 무공해 나물 같은 향기를 꿈꾸는 날이다.

알러지 주사를 맞기 위해 매주 맨해튼에 가기 시작한지도 1년 가까이 되었다. 알러지 양성 반응은 음식은 물론 나무.잔디.꽃과 풀들까지 알레르기 반응으로 상태가 점점 심각해져 의사는 코의 축농증 수술부터 권유했다. 하지만 완치가 아닌 증상완화를 위한 수술을 받고 싶지는 않았다. 의사의 차선책 권고로 알레르기 완화 피하주사를 선택했다. 첫 다섯 단계로 각각 열 번에 거쳐 매주 강도를 높여가며 알러지 항원 면역강화를 위한 주사를 맞기 시작했다.

맨해튼에 차를 드라이브 하는 것은 젊어서도 무법 운전자들의 횡포를 감당할 자신이 없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나까지 교통체증을 보탤 필요 없겠다는 생각에, 탐욕과 집착으로 가득한 마음을 가난하게 비워보고 싶기도 해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 했다. 먼저 익스프레스 버스를 이용하니 교통체증에 2시간 이상을 버스 안에서 보내는 날이 많았다.

물론 계절 따라 바뀌는 창 밖의 풍경은 감성을 자극하지만, 그러다 지하철을 이용하기 시작하며, 처음엔 불결한 지하철역이나 무례한 승객들의 행동도, 지저분한 지하철 안도 신경이 쓰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익숙해져, 힘들게 오르내리던 계단도 속도가 빨라지면서 지하철 풍경들이 따스하게 다가 오는 것을, 너무 늦은 나이에 알게 되었고, 겨울날 얼음 밑으로 흐르는 물소리를 듣는 자세로 삶을 깊이 바라보고도 싶었다.



지하철 안은 70% 정도 승객들이 스마트폰에 열중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고 신문이나 잡지를 접하는 승객들, 중년의 백인여성은 뉴욕타임스를 뒤져 접으며 읽는 모습도, 젊은 동양여성은 자리에 앉자마자 뜨개질을 시작한다. 정거장이 바뀔 때마다 1번 전철 풍경은 바뀌어갔다. 아코디온을 연주하며 베싸메무초를 열창하는 세 명의 남미인들이 동전과 지폐 몇 장이 든 모자를 돌리며 지하철을 누비고 있다. 승객들이 바뀌며 젊은 흑인가수(?)가 가스펠송으로 영혼을 흔드는 음색은 승객들에게 황홀한 순간을 선물해 주기도 했다. 내 옆자리 60대 하얀 머리에 이어폰을 쓴 남자 승객은 박자를 맞춰 머리를 흔들며 음악 속에 빠져 있는 모습도 신선했다. 지구촌 모든 인종박람회장 같은 뉴욕지하철 이용객들의 풍경이 점차 익숙해져 갔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 하지 않나. 만원승객들 틈에 떠밀려 전철 안쪽으로 손잡이를 찾아 서 있을 때 독일어와 영어를 섞어가며 얘기를 하던 여자 승객이 눈을 맞추며 자리를 양보해준다. 사양하니 "다음 정거장에서 내릴 거예요"라는 말에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으로 자리에 앉아 승객들을 관찰한다. 여학생들이 한참 수다를 떨다가 서둘러 내리는 바람에 책갈피에 있던 북 마크가 밀려 그만 바닥에 떨어졌다. 맞은편에 앉았던 40대(?) 금발의 여자승객이 의자 밑에 떨어진 예쁜 고양이와 하얀 개 사진의 북 마크를 주어서 내게 환한 미소로 건네주었다.

누군가 인생은 빈 그릇을 채워가는 여정이라 했던가, 이렇듯 따뜻한 마음의 향기를 담는다. 사랑이란 과거 현재 미래를 초월해 아름다운 우리들의 모든 소망들을 여는 열쇠가 아닐까? 잠깐 왔다 가는 세상에 아름다운 정을 나누며 살아야 함을, 산다는 것은 더 사랑하고 용서하고 용서받고 감사하면서 그리운 사람으로 남고 싶고, 받은 것들을 돌려줘야 할 생각으로 오늘도 누구에게나 따뜻한 품성을 지니며 살 수 있기를 꿈꾸며 지하철에 오른다.


이재숙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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