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기사공유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
  • 공유

[기 고] 달빛에 물든 의학도의 독립운동사

2019년 3월은 독립에 대한 민족적 열망이 일시에 분출된 달인 것 같다. 그 이유가 아직도 눈을 감지 못 한 영혼들의 울림이 우리 곁에 머물러 있는 까닭인지, 아니면 대한민국 근현대사에 가장 크게 기록될 사건 중의 하나인 3·1 독립만세운동이 올해로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에 그 영혼들의 울림이 우리를 깨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어릴 때부터 할머니에게 들은 할아버지 이야기가 계속 귓가에 맴돈다.

경남 김해 연지공원에 조성된 3·1 운동 기념관. 그 한쪽 편, 지사(志士)라는 이름 위에 빛바랜 사진 한 장으로 남아 있는 인물, 나의 할아버지, 배동석 열사(사진)가 그 운동의 중심이었다.

김해교회를 설립하여 어려운 이웃들을 돕고, 김해 합성학교를 설립해 교육운동으로 애국에 힘을 썼던 배성두 장로의 장남으로 태어난 할아버지는 1919년 당시 세브란스 의전(지금의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학생으로서 3·1 만세운동의 학생대표로 활동했다.

만세운동이 일어난 직후 당시 탑골공원에서 학생대표로 직접 낭독했던 기미독립선언서를 처가가 있는 경남의 함안 칠북면으로 가져옴으로써, 그곳의 연개장터에서 일어난 만세운동과 김해 만세운동의 주역이 됐다.



만세운동을 벌이다 체포된 할아버지는 경성까지 이송돼 서대문 형무소에서 유관순 열사와 함께 옥고를 치렀다. 할아버지는 고문으로 손, 발톱은 물론 두 눈까지 빠지게 되었고 면회 당시 그 모습을 본 할머니는 그 자리에서 혼절을 했다고 말해줬다. 모진 수감 생활 끝에 결핵까지 걸린 할아버지는 병보석으로 출소했지만 3개월 뒤에 세상을 떠나셨다.

할머니는 독립운동 자금을 전달하려는 할아버지에게 "생활비에 보태쓰게 조금만 주시면 안 되겠어요?"라고 얘기했다가 "어찌 국민의 혈루(血淚)를 가져다 쓸 생각을 할 수 있겠소"라며, 엄청나게 호통만 들으셨단 말을 자주 하셨다. 할머니는 이 이야기를 할 때마다 눈물을 감추시려는 듯 올려다본 하늘처럼 텅 빈 푸념으로 마무리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등에 업은 어린 손자에게만 이런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었던 할머니의 마음을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아프다.

그렇게 당시 독립운동가들이 흘린 '피와 땀' 나라와 민족에 대한 사랑과 독립에 대한 열정이 있었기에 지금의 자유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것이리라. 그들의 삶이, 내 할아버지의 삶이 잊히지 않고 기억되길 바란다. 이번 100주년 행사에 참가한 후 그들의 정신이 한국뿐만 아니라 미주 한인사회에도 계승되고 있음을, 그로 인해 미래가 밝음을 나는 후손들을 보며 확신한다.


배기호 / 수필가·가주약사회 자문위원장



Log in to Twitter or Facebook account to connect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help-image Social comment?
lock icon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