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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순 칼럼]모지스 할머니가 들려준 이야기


눈 깜작할 사이에 햇볕 짱짱한 오전을 보내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들어온다. 어영부영하다 보면 오후도 잠깐일 터라, 요즘 머릿속이 복잡하다. ‘삶에서 불필요한 잔가지들은 잘라내고 본령에 충실해지자’는 생각이 신경줄처럼 팽팽하다. 이참에 삶의 곁가지는 미련 없이 정리하고 하고 싶은 일에만 집중해야지. 지금이야말로 ‘내 삶을 돌아보고 나를 챙겨야 할 시간’이라는 결론인데, 이것이 딜레마이다. 오랫동안 해온 일을 접자니 걸리는 것이 한두 가지라야지!

서가에서 복잡한 마음을 한방에 정리해줄 책이 없나 뒤지는데 한권의 책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서가 귀퉁이에 꽂혀 잠자던 책이다. ‘인생에서 너무 늦은 때란 없습니다’ 일순 제목에 호기심이 발동해 단숨에 읽어 내려가니 강렬한 제목만큼 내용도 알짜배기다. 그림이 3분의 2, 그 가운데 깃든 글은 3분의 1이나 될까. 그림책이라고 해도 과하지 않을 이 책은 미국 출신 ‘애나 메리 로버트슨 모지스(Anna Mary Robertson Moses)’ 할머니가 100여 년의 인생을 스케치해 놓은 책이다. 76세에 붓을 든 작가는 그림을 그린 지 5년 만에 전시회를 열었는데 그때부터 라디오와 텔레비전에서 출연 요청이 쇄도했고 ‘타임’ 지의 커버를 장식하고 이내 그녀의 삶은 다큐멘터리로 제작되었다. 한시도 손을 놀리지 않은 그녀는 101세에 세상을 뜨기까지 1600여 점의 작품을 남겼다.

그림을 배운 적 없는 작가가 자연과 사람 사는 이야기를 어찌나 농밀하게 표현했던지 눈을 박고 감상했다. 자녀 10명을 낳아 5명은 병으로 잃고 5명을 키워가며 밥벌이로 시럽을 만들고 단풍나무에서 수액을 받아 내다 팔고, 추수철 농민들의 삶과 미국 독립전쟁에 조상들이 참전한 일 등, 글과 그림을 감상하는 내내 고요한 평안을 누렸다. 따듯한 풍경의 그림에서 작가의 꿈과 행복을 읽을 수 있었고, 할머니의 개인사뿐만 아니라 미국의 역사와 전통까지 이해할 수 있었다. 덩달아 내 유년의 고향 풍경을 소환해 진한 향수를 만끽할 수 있었으니 훌륭한 갤러리에 다녀온 양 영혼이 말개졌다.

미국인들에게 그림으로 전통과 뿌리를 환기시킨 작가는 활기찬 노후의 아이콘이었다. 케네디 대통령이 그녀를 “미국인의 삶에서 가장 사랑받는 인물”이라고 평가했다니 공감한다. “내가 만약 그림을 안 그렸다면 아마 닭을 키웠을 거예요. 지금도 닭은 키울 수 있답니다. 나는 절대로 흔들의자에 가만히 앉아 누군가 날 도와주겠거니 기다리고 있진 못해요.” 100여년을 늘 새로운 날처럼 산 작가의 인생 철학이 이 한 줄에 녹아 있는데, 귀한 생을 허투루 낭비하지 말라는, 내게만 집중하는 삶을 살아서도 안 된다는 일침이었다.



열악한 삶의 여건을 질료 삼아 최고의 삶으로 창조해낸 동력이 바로 작가의 적극적인 삶의 자세, 부지런함에서 기인했다. 우리는 문명의 이기 속에서 전대미문의 편리함을 한껏 누리고 살면서도 에너지가 부족해 늘 시난고난, 영혼이 허기진다.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보다 두려움이 앞서니 홀가분한 삶이 좋은 거라고 자신을 꼬드긴다. 첨단 과학에 예속된 영혼은 날로 황량해지고 이기적으로 된다. 그러니 남루한 인간사를 뛰어넘지 못하고 삶을 옹송그리는 것이다. 마음을 기계에 빼앗기고 여유가 없으니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는 삶의 회로에서 벗어나려고 안달이다. 삶을 풍성하게 이끄는 가지들을 단박에 잘라내려 용을 쓴다. 이것저것 잔가지를 쳐낸 삶이야말로 삶을 충만하게 이끌 거라는 착각에 빠져있다. 지금 당장 몸과 마음을 복잡하고 피로하게 만드는 삶의 잔가지들을 싹둑 잘라내면 삶이 더욱 밀도 있고 촘촘해질 거라고 말이다.

모지스 할머니가 전하는 이야기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겠다. 배울 것도, 심취할 것도 많은 세상! 적절한 때가 있는 것도 아니요, 무슨 일이든 마음먹은 지금이 가장 좋은 때이니 하고 싶은 그 무엇이 있거든 오늘 지금부터 온 마음을 다하고 삶이 재촉해도 절대 서두르지 말란다. 무엇보다 세상에는 꼭 돈이 되는 일이 아니어도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일들이 정말 중요하다는 걸 삶으로 보여주었다. 모지스 할머니가 돌아가시던 그 날까지 그림과 글로 우리를 깨우듯 나이 들수록 조용히 그러나 부지런히 이웃과 사회를 위해 삶의 외연을 넓혀야겠다. “삶이 준 것들로 최고의 삶을 만들었노라, 결국 삶이란 우리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일러주는 그녀의 목소리가 삶의 반경을 대폭 줄이려는 내게 경종을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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