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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 포럼] 자유·인본·사회주의 공존 꿈꿨던 '호 아저씨'

베트남 전쟁 지상 강좌 ①

성지 같은 하노이 호찌민 박물관을 찾은 베트남 어린이들. [사진 이길주 교수]

성지 같은 하노이 호찌민 박물관을 찾은 베트남 어린이들. [사진 이길주 교수]

베트남의 민족해방 투쟁이 미국과 충돌하기 시작한 시점은 1954년이다. 프랑스가 그 해 호찌민이 이끄는 '베트민(Viet Minh)' 혁명군에게 패하고 인도차이나를 떠나면서 미국은 베트남이란 역사적 짐을 떠안는다. 햇수로 따지면 올해가 65주년이 된다. 올해는 또 호찌민 사망 50주년이다. 베트남의 의미를 돌아보기에 좋은 시점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전후 미국의 모습이다. 큰 시각에서 보면, 베트남 전쟁 이후 미국은 베트남의 트라우마를 극복하려 노력해 왔다. 때로는 군사적 힘의 과시, 역사의 재해석, 평화 제스처, 경제 투자 등을 섞어 베트남 전쟁에서 입은 상처를 치유하려 애써왔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도 미국의 정체성을 '강한 미국'으로 정립해 가려 하고 있다. 그 내면에는 미국의 의식적 저변에 깔린 베트남 극복의 욕구가 있다. 중국, 북한, 이란에 대해서도 "또 당할 줄 알아?"하는 분개심이 느껴진다. 그래서 베트남 전쟁은 현재 진행이고 공부를 해 볼 가치가 있는 것이다.



29년 전투 400만 명 전사

베트남 전쟁은 1, 2차로 나눈다. 1946년에서 1954년 까지는 호찌민이 이끄는 베트민(베트남 독립 동맹)의 대프랑스 독립 투쟁이다. 이 전쟁에서 베트남을 거의 한 세기 식민 통치해 온 프랑스가 패함으로써 베트남은 남(구 월남)과 북(구 월맹)으로 갈렸다. 그 후 월남이 패망하는 1975년까지 11년에 걸쳐 제2차 베트남 전쟁이 이어진다. 1, 2차 베트남 전쟁을 더하면 그 기간이 29년이다. 이 전쟁에서 남북 베트남을 합쳐 300만 내지는 400만의 군인과 민간인이 생명을 잃은 것으로 추산한다. 더불어 미국이 약 5만8000명, 한국이 약 5000명의 사상자를 냈다.



베트남 전쟁의 아이콘은 조국 통일을 6년 앞두고 사망한 북베트남의 지도자 호찌민이다(이 이름은 그가 제2차 세계대전 발발 후 50세에 베트남으로 돌아와서부터 쓰기 시작했다). 민족의 통일을 위한 그의 불굴의 의지를 빼고 베트남 전쟁을 이해하기는 불가능하다.

호찌민 시(구 사이공)의 베트남 근대사를 압축하는 광경이다. 왼쪽은 민족해방 투쟁당시의 게릴라들을 형상한 동상. 가운데가 프랑스 식민시절의 건물. 오른쪽 유리 빌딩은 개방된 베트남의 상징인 현대식 건물. 우측 하단에는 사이공 함락 당시 미군의 마지막 헬기가 앉았던 옥상 구조물이 보인다. [사진 이길주 교수]

호찌민 시(구 사이공)의 베트남 근대사를 압축하는 광경이다. 왼쪽은 민족해방 투쟁당시의 게릴라들을 형상한 동상. 가운데가 프랑스 식민시절의 건물. 오른쪽 유리 빌딩은 개방된 베트남의 상징인 현대식 건물. 우측 하단에는 사이공 함락 당시 미군의 마지막 헬기가 앉았던 옥상 구조물이 보인다. [사진 이길주 교수]



아이콘·민족주의자 호찌민

호찌민은 반대편에 서 있던 나라와 사람들에게 악몽과 같은 적장이었다. 그의 게릴라 전술은 민간 주거 지역을 전장화 했고, 여기에 대응하는 반게릴라 전술은 상상을 초월하는 민간인 피해를 불러왔다. 하지만 이상한 현상이 있다. 베트남을 찾는 한국과 미국의 여행객들이 호찌민 묘소와 기념관을 빼놓지 않고 방문한다는 점이다. 관광객의 단순한 호기심의 표출이라 해도 호찌민에 대한 부정적 정서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는 공산주의자라기보다 베트남 민족주의의 화신이란 평가 때문이다.

두뇌가 뛰어난 민족주의 성향의 청년으로 베트남에서 엘리트 교육을 받은 호찌민은 21세가 된 1911년 베트남을 떠난다. 그 후 2년 동안 호찌민은 프랑스 여객선에서 주방보조로 일하며 세계를 누볐다. 이즈음 그는 프랑스의 식민통치 체제에 속한 베트남 현지 관리가 되는 꿈을 갖고 있었다. 프랑스 사회의 진보성과 문화의 우수성을 믿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혁명의 힘찬 선언 '자유, 평등, 박애'의 휴머니즘을 그는 프랑스 정신과 문화의 진수라 확신했다. 이런 프랑스가 베트남에서 취하고 있는 비인간적 식민 수탈 정책은 프랑스의 본질이 아닌, 오도된 식민주의자들의 일탈 행위에 가깝다고 보았다. 호찌민은 식민정책의 내재적 개혁 가능성을 믿었다. 그는 프랑스의 양심세력, 즉 혁명적 좌파지성에 호소해 베트남에 대한 식민통치를 종식시킬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민족자결주의 믿었지만

이런 호찌민은 머지않아 국제 공산당 운동의 전문적 선동가의 길로 들어선다.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개최된 파리 강화회의 때문이었다. 여기에 민족자결주의를 선포한 미국의 우드로우 윌슨 대통령을 위시한 승전국의 대표들이 모였다. 호찌민은 민족자결주의가 베트남에도 적용되리라 믿었다. 회의장인 베르사유 궁전에 들어가 승전국 프랑스가 베트남에 자유를 줄 것을 호소하려 했다.

하지민 승전국 대표들은 무명의 식민지 청년을 무시했다. 호찌민은 베트남 "애국동포" 들의 호소란 이름의 탄원서를 강화회의장에 전달했지만 이 문서가 실제로 대표들에게 전달되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호찌민이 구엔 아이 쿡(Nguyen Ai Quac, 애국자 구엔) 이란 이름으로 보낸 탄원서에는 8개항의 구체적 요구가 들어 있다. 이 탄원서를 보면 그가 프랑스 사회와 정치권에 대해 갖고 있었던 기대와 신뢰가 얼마나 컸는지를 알 수 있다. 그는 당장 베트남의 독립을 요구하지 않았다. 프랑스라는 울타리 안에서 베트남이 프랑스와 평등한 관계를 맺고 자치적 지위를 얻고자 했다. 프랑스와 동등한 권리를 가진 형제로 존재하길 원했다. 프랑스의 상징 자유, 정의, 형제애의 숭고한 이상을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을 믿는다고 했다.

하지만 프랑스는 베트남에 동등권과 자치 지위를 안겨줄 마음이 없었다. 호찌민이 믿었던 프랑스 좌파들은 오히려 식민지로서 베트남이 계속 프랑스의 산업화에 기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해서 산업화가 심화되면 계급 혁명의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마르크스의 원리를 강조했다.

이때 호찌민은 레닌의 반제국주의 투쟁 논리를 만났다. 나중에 호찌민은 눈물을 펑펑 쏟을 만큼 감격했다고 그 순간을 회상했다. 레닌은 제1차 대전을 제국주의 경쟁에서 비롯된 자본주의 세계의 집단 자살행위로 파악했다. 한계와 취약점이 노출된 자본주의, 제국주의 국가들에 대해 피지배민족들이 해방투쟁을 벌이는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했다. 세계 공산당 운동의 사상, 선동, 군사적 지원과 더불어 상당수준 공업화에 성공한 소련이 물질적 지원을 제공하면 베트남과 같은 후진 농경사회에서도 반제국주의 혁명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 명쾌한 논리에 감동받은 호찌민은 1923년 소련으로 가 전문 선동가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미국과 한때 대일전쟁 동지

1941년 호찌민은 베트남으로 돌아왔다 고향을 떠난 지 30년 만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이었다. 독일에 항복한 프랑스는 친나치스와 반나치스, 둘로 갈렸다.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식민지는 친나치스 통치하에 놓이고, 1941년 이곳에 히틀러와 동맹을 맺은 일본이 상륙했다. 이제 베트남은 프랑스와 일본의 어색한 동거 하에서 두 개의 외세에 의해 수탈을 당한다. 프랑스는 식민통치자, 일본은 침략군으로 등장한 현실은 호찌민에게 민족주의에 기초한 무력 투쟁의 터전을 제공했다. 곧 일본과 미국이 적이 되면서 호찌민은 미국의 인도차이나에서의 대일 전쟁 수행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동지가 되었다.

호찌민과 베트민 지도부를 만난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 CIA 전신) 요원들은 호찌민의 민족주의 성향과 인간적 매력을 보았고 베트민과의 긴밀한 협조관계에 가치를 부여했다. 하지만 이 협조관계는 종전 후 바로 끝났다. 프랑스의 재건을 반공산주의 유럽 건설의 필수 조건으로 파악한 미국은 베트남에 대한 프랑스의 식민통치 회복을 막지 않았다. 자유주의를 대표하는 미국, 휴머니즘을 상징하는 프랑스, 피지배국가의 해방을 외쳤지만 유럽의 공산화에 더 큰 관심이 있었던 소련. 호찌민이 믿었던 베트남의 친구는 없었다.



반제국주의 혁명가의 길로

모든 것이 원래의 위치로 돌아갔다. 강자는 강자의 편일 따름이었다. 세계 자본주의는 식민지 수탈 없이는 기능하지 못함이 확인됐다. 제1차 세계대전도, 제2차 세계대전도 같은 논리였다. 승전국들은 세계대전을 야만적 집단에 대한 이성적 연합 세력의 선한 싸움으로 규정했다. 호찌민은 제국주의야말로 피지배민족에 대한 야만성임을 주장했지만 모두가 그의 외침을 일축했다. 1946년 호찌민이 이끄는 베트민은 프랑스 제국주의에 대한 조직적 항전을 시작했다. 물론 미국은 프랑스를 지원한다.

프랑스의 식민지 관리가 되겠다는 소박한 꿈을 가졌던 청년은 30년 만에 불굴의 반제국주의 혁명가로 30년 전쟁을 이끌었다. 아직 전쟁이 한창이던 1969년 9월 그는 사망했다. 북베트남의 전열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사후에도 전쟁을 지휘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키워 놓은 지도부는 결국 미국을 베트남에서 떠나게 했다.

호찌민은 누구인가? 세계 공산화를 꿈꾼 공산 혁명가가 제일 흔한 평가이다. 하지만 만족스럽지 않다. 그는 자유주의, 인본주의, 사회주의가 공존하는 베트남을 꿈꾼 민족주의자였다. 이를 위해 상상을 초월하는, 인간적 한계를 뛰어넘는 투쟁을 벌였다. 그럼에도 "호 아저씨"로 불리길 원했던 초현실적 면모의 혁명가였다.


이길주 / 버겐커뮤니티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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