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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배우며] 송홧가루

골프장 3번 홀 공치는 자리는 언덕 위에 있어, 언덕 아래 낮은 자리에 선 소나무 가지들이 코앞에 보인다. 가지마다 끝자락에 소나무 꽃이 노랗게 피었다. 소나무 꽃들이 반가워 핸드폰 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찍는다.

사진기 렌즈로 본 소나무 꽃은, 장미나 코스모스의 꽃 모습이 아니었다. 한 뼘 솟은 새순 주위를 아기 손가락 모양의 노랗고 통통한 꽃가루 자루가 열 개 정도 달렸다. 꽃 앞에서 보니 새순을 중심 한 노란 꽃가루 자루들이 동그랗게 꽃잎처럼 보인다. 아기 손가락 같은 자루를 만져보니 아직 탱탱하다.

한 주 후에 다시 그 자리에 가보니, 어떤 꽃은 팽팽하던 꽃가루 자루가 비어 비틀려있다. 손바닥으로 소나무 꽃자루 밑을 툭툭 터니, 내 손바닥에 노란 가루가 쏟아져 내려 쌓인다.

어려서 충청도 산골 살 때 어른들이 송홧가루 받는 걸 본 기억이 난다. 소나무 꽃이 달린 가지들을 꺾어다 포대 위에 말리면 노란 송홧가루가 그 위에 쌓이고 그 가루로 다식을 만들어 제사상에도 놓고, 먹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한 주전에 춘분이 있었다. 춘분, 낮의 길이와 밤의 길이가 같은 날. 미국에서는 춘분을 봄의 시작으로 삼지만, 동양의 입춘은 한 달 반 정도 춘분보다 앞선다. 이곳은 위도가 남쪽이어서 봄이 먼저 온다.

“와 저 송홧가루 날리는 것 봐!”

같이 골프 치는 한 분이 소나무 숲을 가리킨다. 일행 모두 그쪽을 보니, 소나무 숲에서 노란 연기, 마치 시골 초가지붕들 위 굴뚝에서 검은 연기가 쏟아져 저녁 하늘을 검게 덮듯, 휘이익 부는 봄의 돌개바람에 노란 송홧가루가푸른 하늘을 노랗게 덮는다.
“저기 서봐, 기념사진 찍어줄게!” 한 친구가 말한다.

“내 핸드폰으로 찍어!” 하며 내 핸드폰을 그에게 주었다. 그가 찍은 사진을 본다. 내가 선 배경 하늘이 송홧가루로 노랗다.

골프장 여기저기 빗물이 고였다 땅속으로 스며든 자리에 동그란 송홧가루 자국이 남았다. 연못 가장자리로 노란 송홧가루가 떠 있다. 골프장 주차장에 주차했던 내 차의 지붕에 송홧가루가 노랗게 쌓였다. 차에 타고 윈도우 스위치를 누르니 차창의 송홧가루가 닦인 자리가 부채모양으로 남았다.

3년 전 워싱턴DC에 사는 친구 부부가 우릴 방문하고, 여긴 겨울에도 골프칠 수 있고, 한국 사람 많아 고향 같고, 음식 많고, 집값도 싸니 은퇴하고 살기 좋은 이곳으로 이사 온다고 했다. 골프를 같이 치다가 갑자기 친구 부인이 눈물 콧물 재채기로 정신 못 차리며, 하늘을 덮는 노란 송홧가루를 보고는 이사 계획을 없었던 거로 했다. 한두 주만 지나면 괜찮은데.

송홧가루는 바람에 날려 솔방울로 옮겨져 솔 씨를 만든다. 생긴 지 2년이 된 솔방울 비늘마다 속에 수정되지 않은 알을 준비하고, 송홧가루가 날리다 끈적이는 솔방울에 묻어 비늘 속에 준비된 알들과 만나 수정란이 되어 씨를 만드는 과정은 다른 식물과 비슷하다. 솔방울 속에서 익은 씨들은 자라고 익어 늦가을에서 이른 봄까지 씨를 바람에 날린다.

11월 어느 날, 들판에서 싸락눈을 맞았다. 무수하게 떨어지는 싸락눈, 싸락눈인 줄 알았다. 잔디밭에 떨어진 싸락눈은 눈이 아니고, 솔 씨였다. 날개가 달린 솔 씨, 바람이 불 때 열린 솔방울 비늘 사이에서 바람에 날려 사방으로 흩어지는 솔 씨들, 들판이 온통 하얗게 씨가 내렸다.

송홧가루, 소나무 숲에서 연기처럼 바람 타고 날리는 그 많은 송홧가루가 단지 솔 씨들을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그렇게 풍성하게 날릴까? 아니면 우리가 모르는 자연의 신비와 은혜, 공생을 위한 다른 공헌은 없을까?

사람은 송홧가루를 일찍부터 먹었다. 특히 송홧가루의 건강 효과는 동서양에서 다 같이 일찍부터 알려지고 지금도 연구되고 있다. 주장되는 효과는 혈관 관계, 고혈압, 중풍, 심장병, 노화 방지, 항산화, 피부에 좋다는 주장들이 있고, 지금도 송홧가루는인터넷에서 많이 거래되고 있다.

“개미들이 득실거리네!”
친구가 중얼거려 땅바닥을 보니 많은 개미가 득실거린다.
“혹시 개미들이 영양가 높은 송홧가루 모으려고 바쁜 것 아닌가?”
“열심히 물어다 쌓아 놓으면 보릿고개 잘 넘기겠네”

겨울 지나고, 겨울양식이 떨어져, 우리가 어려서는 보릿고개라는 배고픈 시절이 있었다. 개미, 지렁이, 달팽이, 노래기, 작은 물고기, 가제, 골방이 등등, 겨울 추위에서 깨어나 활동하는 동물들에게 온 하늘을 노랗게 물들이는 풍성한 송홧가루는 구황 식품이 될 것이 아닐까? 살아있는 생명의 공생의 도움들, 먹이 사슬에서 생물들은 모두 다 연결되어 있고, 송홧가루는 내가 몰랐던 차원 높은 감사의 비밀을 노출하는 것 아닐까?



김홍영 / 전 오하이오 영스타운 주립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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