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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시대의 아이콘이 된 법관. 지난 18일 숨진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사진) 미국 연방대법관 얘기다. 미국 인터넷 쇼핑몰 아마존에는 그의 얼굴을 새긴 티셔츠와 열쇠고리가 팔린다. 연예인이 아닌 법관이 이렇게나 인기를 끌었던 적이 있었던가.

긴즈버그는 작은 사건을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걸 증명했다. 페미니스트란 수식어 때문에 여성 인권만을 주장했다는 오해도 받지만 그가 추구한 건 젠더에 기반한 차별 해소였다. 출산하다 숨진 아내를 대신해 아들을 키운 스티븐 와이젠펠드 사건이 대표적이다. 미국법은 남편을 잃은 편모에게만 연금을 지급했는데 긴즈버그는 1975년 연방대법원에서 승리하면서 이런 관행을 바꿨다. 그는 93년 미국 의회 청문회에서 “여성 혹은 남성에게만 맞는 일은 없다”며 “젠더에 기반한 차별은 (성별을 떠나) 모든 사람에게 상처를 남긴다”고 말했다.

빌 클린턴 대통령은 대법관 지명 연설에서 “긴즈버그가 미국 역사책에 오르려 자리 욕심만 내고 있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예측은 들어맞았다. 긴즈버그는 대법관에 취임하면서부터 적극적으로 소수자를 대변했다. 그에게 반대자(dissenter)란 별명이 따라다니는 이유다. 1996년 버지니아 군사학교가 남성 입학만 허용한 사건에선 “(성별을 떠나) 개인의 능력에 따라 사회에 기여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15년 동성 결혼 합법화 판결문에선 “결혼에 대한 편견을 버려야 한다”며 “결혼은 시민법적인 전통에 기반한 것으로 볼 수 없다”고 말했다. 이런 이유로 보수 진영의 공격이 이어졌다. “좀비” “마녀”라며 그를 비난한 보수 논객도 적지 않았다.

긴즈버그의 마지막은 말 그대로 몸을 바친 투쟁이었다. 10년이 넘는 암 투병 기간에도 긴즈버그는 “은퇴에는 관심이 없다”며 대법관 자리를 지켰다. 하지만 긴즈버그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보수 5명, 진보 4명으로 구성된 미 대법원은 보수색이 짙어질 가능성이 커졌다. 긴즈버그는 법원에 갇히지 않았다. 숨지기 직전까지 외부 활동도 적극적으로 펼쳤다. 그는 2018년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RBG에 출연해 좌우명을 공개했다. “독립적인 사람이 되라(be independent)는 어머니의 말을 마음에 항상 새기고 있다.” 대한민국 법관에게 이 다큐를 권한다.




강기헌 / 한국 산업1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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