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겨울, 그 인생의 날들
한파가 몰아치던 어느 해 겨울, 이곳에 왔었다. 겨울 청아한 공기가 콧속으로 밀려 들어온다. 콘트라베이스의 저음이 저 멀리 군락을 이룬 나무들 사이에서 들려온다. 파이프 올겐의 드라이한 음들이 나무가지 사이로 불어 오는 듯하다. 멀리까지 확 트인 설경은 마음을 말끔히 씻어주기에 충분하였다. 나무가지마다 피운 눈꽃은 햇빛에 반사되어 쳐다볼 수 없을 만큼 황홀하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발 끝이 얼어오는 느낌을 받은 건 꽤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길도 없었다. 모든 것들이 눈 속에 덮혀 있었고 찬바람과 마주하며 곧게 뻗은 나무들만 그곳에 서 있었다. 넓게 펼쳐진 하얀 대지는 모든 것을 껴안고 있었다. 홀로 있다는 외로움이 함께 있고 싶은 그리움으로 바꾸어지는 동안, 나는 그곳에 나무같이 서 있었다. 아니 나도 한 그루의 나무가 되어 찬 바람을 맞으며 한겨울을 견디어내고 있었다.
시카고에 온 그 다음해 겨울 엄청난 폭설이 내렸다. 눈을 치우러 밖으로 나왔지만 허리까지 쌓인 눈, 차들의 지붕까지 덮어버린 난감함에 다시 집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며칠 고립된 동안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었지만 모두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미로처럼 눈을 파들어가며 길을 내 보았지만 속수무책이었다. 그런데 그 며칠동안 이상하리만큼 마음이 편했다. 내짐을 발 밑에 내려 놓으니 무겁게 누르는 고통은 사라졌다. 얼마가 지나 폭설의 악몽이 희미해진 그 다음해, 시카고 시장은 제설작업의 늦은 조치로 인해 시장직에서 물러났다.
겨울, 그 인생의 날들
인생의 날들도 이런 겨울날씨와 같지 않을까?
헤어날 수 없는 고통의 순간 속에서도 깊은 잠을 청할 수 있는 안식의 시간들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지나보면 어떤 어려움도 견딜만한 순간이었음을 깨닫게 된다는 것을. 격동의 시간도 지나고 햇살 비치는 따뜻한 봄날이 오리라는 것을. 그렇게 한파와 미풍을 맞으며 겨울이라는 한 계절을 지나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가 만일 생각한대로 살지 않으면, 우리는 어느새 살고 있는대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초봄 같은 겨울이든, 늦가을 같은 겨울이든, 아니면 한파와 폭설의 한가운데 있는 겨울이든, 우리는 일년의 한 계절을 지나가고 있을 뿐이다. 팔 벌려 하늘 향해 뻗은 나무들은 안다. 겨울날은 그리움이 눈처럼 날린다는 것을, 쌓이기도 하고 녹기도 하면서 더 깊어져 간다는 것을, 높이와 넓이를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이해하게 된다. 그리움은 하늘 위에서 보면 한가지 생각이라는 것. 한가지 색상이라는 것. 한가지 소리로 들린다는 것. 함부로 대할 수 없는 향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겨울, 그것이 바로 살아가면서 느끼고, 체험하고, 터득하고, 이해하고, 사랑하는 인생의 날들이라는 것을. (시인/화가)
신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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