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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잡스 따라잡기-1] 황소 고집

입양 - 대학중퇴 - 기인생활…눈빛만은 달랐다

실리콘밸리 30년 패라다임은 아이디어 기반의 신기술 상업화와 기술 발전속도의 함수관계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역사 속에서 수많은 회사들의 부침이 있었고 이중 벤처신화 1호 애플과 스티브 잡스의 ‘반전 드라마’는 할리우드도 상상 못한 초특급 블럭버스터다.

지난 97년 스티브 잡스가 임시 CEO로 재취임했을 때 애플은 파산일보 직전이었으며 이후 기적처럼 회사를 재건했지만 2007년까지만해도 운좋게 살아남은 하나의 컴퓨터 가전회사다. 하지만 오늘날 애플은 엑손(Exxon) 다음으로 최고 주식가치 기업이며 월가에선 조만간 트릴리온(Trillion) 달러 규모의 최초 회사가 탄생할 것을 의심치 않는다.

"세상을 바꾸자"는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세상을 바꾼 사람"은 흔치않다. 동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은 스티브 잡스가 4번이나 세상을 바꾼것을 경험했다. 84년 매킨토시, 2001년 아이팟, 2007년 아이폰 그리고 2010년 아이패드…

안타깝게도 스티브 잡스는 현재 병마와 사투를 벌이고 있다. 2004년 생존률 1% 미만의 췌장암 판정을 받고 죽음의 문턱에 다가섰지만 그가 바로 그 1%였다. 하지만 2009년 간이식 수술을 받고 신한부 생명을 통고 받았다. 필수 면역억제제를 복용하면 암세포 전이가 빨라지고 암을 잡으면 면역억제제가 무용지물이다. 잡스는 현재 세번째 병가를 내고 치료에 집중하고 있다. 불꽃같은 그의 일대기와 애플의 반전드라마를 조명해본다.



미혼모에게서 출생

천성이 선한 스티브 워즈니악(애플 컴퓨터 공동창업자)은 샌호제를 떠나 캘리포니아 5번 프리웨이를 신나게 달렸다. 5살 아래 잡스가 오리건주의 사립대 리드 칼리지(Reed College)에 입학한다니 기쁜 마음으로 라이드를 해줬다. 머리도 식힐겸 잡스의 기숙사에 잠시 눌러앉았던 워즈니악은 본의 아니게 신입생 잡스의 불평불만 접수원이 됐다.

첫 강의에서 돌아온 잡스는 "공부가 싫다"는게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공부를 배울 수 없다"며 투털댔다. 워즈니악은 "이거 대형사고났구나" 라고 훗날 회고한다.

잡스는 입양아였다. 그는 2005년 스탠포드대 졸업식 연설자로 나와 처음으로 자신의 출생비밀을 공개했다. 대학생이었던 생모가 임신을 하게되고 50년대 사회풍토상 미혼모의 출산은 너무나 고통스런 앞길이기에 출산과 함께 입양을 결정했다. 아기의 미래를 생각해 대졸 양부모를 찾았지만 아기가 태어나자 이들은 입양을 거부했다. 딸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대졸이 아닌 노동자 출신의 양부모를 찾았고 생모는 아기를 반드시 대학교육까지 시키겠다는 약속을 받고나서야 입양서에 사인했다는 이야기다.

양부모는 잡스가 주립대를 가길 희망했지만 꼭 리드 컬리지를 가야한다는 잡스의 고집에 넘어가 첫학기 등록금에 평생 저축한 돈을 털어넣었다. 잡스가 리드 컬리지에 들어간 이유도 별거 아니었다. 자신의 전공과도 상관없는 노벨상 수상 물리학 교수가 그곳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 보고 입학을 결정한 것이다.

한 학기 마치고 휴학

한 학기가 지나자마자 휴학계를 낸 잡스는 학교를 떠나지 않고 도서실과 친구들 기숙사를 전전하며 '도강'을 즐겼다. 교수들도 알고 있었지만 왜 자신이 도강 학생인지를 펼쳐보이는 언변이 하도 기특해 그냥 내버려 뒀다고 한다.

잡스의 고집은 사실 어려서부터 유명했다. 말수적고 성적이 좋은 학생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냥 눈에 밟히지 않는 평범하면서도 감수성 예민한 학생이었다. 중학교에 입학한 13살때 그는 처음으로 부모와 충돌했다.

어느날 학교에서 돌아온 그는 양부모에게 더이상 학교 다닐 수 없다고 선언해버렸다. 학교가 맘에 안든다며 왜 자신이 이 학교를 다니면 실패할 수밖에 없는가를 조목조목 설파하고 있었다.

재미난 사실은 잡스의 양부모가 바로 이런 설득에 넘어가 10년 넘게 살았던 정든 집을 팔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결정했다는 것이다. 순전히 잡스의 학교를 옮겨주기 위해서였다. 맹모삼천의 정성일 수도 있겠지만 양부모의 전언은 자신들이 잡스의 고집과 언변에 백기항복했다는 것이다.

도강생활을 청산한 잡스는 다시 집으로 돌아와 워즈니악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당시 실리콘밸리 최대기업 HP의 말단 직원이었던 워즈니악은 '블루 박스'라는 최초의 전화해킹머신을 개발했다. 공짜로 국제전화 등 장거리 전화를 걸수있는 장치였다.

게임업체에 취직

잡스는 서서히 자기 생활에 질리기 시작했다. 어느날 갑자기 친구들 모인자리에서 잡스는 직장을 잡겠다고 선언했다. 설명이 필요없는 히피족이었던 잡스는 제멋대로 자란 머리 수북한 수염에 찢어진 청바지와 구멍난 티셔츠 차림이었다.

그는 또 사과와 당근만 먹는 채식주의자여서 목욕을 안해도 괜찮다는 생각을 했고 이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겐 정말 참을 수 없는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헌데 첫 직장 인터뷰가 있다며 그가 찾아간 곳은 바로 비디오 게임의 선구자 ATARI.

70년대 중반 ATARI는 Pong이란 최초의 비디오게임으로 실리콘 벨리에서 큰 돈을 벌고 있었다. 잡스가 찾아간 그날 회사 로비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친구들한테야 '인터뷰'한다고 뻥쳤지만 순전히 배짱만 믿고 무대포 심정으로 쳐들어간 것이다. 왠 거지 하나가 들어와 "JOB을 주지않으면 절대 나갈 수 없다"고 버티고 서있었다.

아수라장으로 변한 로비에 지나가던 사람이 있었으니 ATARI 창업자 놀란 부쉬넬사장이었다. 그는 잡스의 해프닝을 지켜봤다.

이때 다른 회사였으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 벌어졌다. 부쉬넬은 "저 친구 눈빛이 보통이 아냐! 몬가 다른데 사고치지 않을 부서에 맡겨서 일거리 하나 줘봐"라고 직원에게 말하곤 사라졌다.

부쉬넬 사장은 나중에 잡스와 워즈니악에게 'BreakOut'이란 게임 개발을 맡기기도 했다. 잡스가 개발금 5000달러를 받고도 워즈니악에겐 700달러 받았다며 반반씩 나눴던 일화는 지금도 유명하다. 한편 부쉬넬사장은 이후 비디오 게임 사업을 접고 'Chuck E. Cheese's'란 피자 레스토랑을 시작해 크게 성공했다.

이정필
전직언론인
디지큐브대표
블로그 www.jpthegreenfus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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