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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때를 기다리는 자연
정동협/뉴저지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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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중앙일보]    발행 2012/05/02 미주판 19면    기사입력 2012/05/01 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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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의 향연이 시작된 뉴저지의 거리는 차츰 활기를 찾았다. 봄이 온 소리가 달리는 차량의 속도 만큼이나 빠르게 달려온 듯하다. 노란색 개나리는 옅은 병아리 색에서 시작하여 이젠 짙은 색의 향기로 요염한 자태를 뽐내며 우리의 눈을 현혹 시킨다.

뉴욕의 명산 중 하나인 캐츠킬도 예외는 아니다. 곳곳에 파릇파릇 고개를 내미는 싹들이 수줍은 듯 머뭇머뭇 거리며 때를 기다리는 청춘의 향기 마냥 싱그럽기만 하다. 캐츠킬만 해도 조지 워싱턴 다리에서부터 북쪽으로 2시간을 더 달려야 하니까 추운 기온 탓인지 아직은 초목의 푸르름이 내가 사는 동네 같지는 않다. 아직 때가 이른 것이리라.

올라갈수록 몰아치는 찬 바람이 지쳐가는 내 몸을 채찍질 하듯 뺨을 때린다. 중간 중간 산중턱에서 바라 보는 캐츠킬은 한국의 바위산과는 다르게 온화한 느낌으로 나를 바라보는 듯하다. 부드러운 듯 보이지만 3800피트에 달하는 슈갈로프 산은 캐츠킬 중에서도 험한 코스로 손꼽힌다던가.

1마일 가량을 가파르게 오르는 산행에 한 순간 숨이 목까지 차고 다리에 통증이 느껴진다. 다행히 산 정상은 전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은은한 향이 힘든 산행에 지친 피로를 잊게 해준다.

전나무 숲을 지나자 정상의 둘레에는 아직 새싹도 돋지 않고 죽은 듯 가지만 드리운 앙상한 나무들이 따뜻한 온기를 기다리며 잎을 피울 때를 기다리고 있다.

전나무 숲의 정기를 흠뻑 마시고 이제 내려갈 준비를 한다. 밑으로 내려갈수록 오를 때 힘들어서 보지 못했던 나무들이 때를 기다리며 차례대로 싹을 내고 있는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앙상한 가지에서 연두색의 고개를 내미는 새싹, 그리고 반쯤 옷을 입은 중턱의 나무들.

자연은 거짓이 없다. 너무도 정확함에 우리들은 항상 그 앞에선 겸허해 지지 않았던가. 우리는 살면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때를 기다리며 혹은 때를 놓치며 살아 왔던가. 나는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서두르다가 일을 망친 적이 더 많았던 것 같다.

미국이 아니 전 세계가 지금 심한 몸살을 앓고 있다. 어제 오늘 하던 경기 회복이 빛을 바랜 지도 벌써 4년째로 접어 들었고 앞으로도 얼마나 더 침체 될는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하지만 지나온 일들을 되새겨보면 항상 느끼는 것은 그때 그렇게 서두르지 않아도 됐는데 하는 아쉬움이다. 그렇다고 지금의 어려움이 넘기 쉬운 산이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단지 모두들 이구동성으로 힘들다 힘들다 하면서도 하루 하루는 지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산을 오를 때 한발 한발 오르다 보면 정상이듯이 말이다.

등산을 해본 사람들이라면 느끼는 게 한가지 있다. 높은 산을 한 번 오른 후에는 예전에 다니던 낮은 산에 발길이 잘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낮은 산이 주는 온화함과 푸근함은 언제든지 내 곁에 있는 어머니, 혹은 아내의 모습처럼 편안함을 준다.

반면에 높은 산은 항상 미래에 대한 도전이며 나 자신에 대한 도전이다. 높은 산일수록 오를 때 힘이 들지만 정상에서 느끼는 기쁨은 모든 힘든 순간들을 한 순간에 잊게 해주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고통스러운 한발을 정상을 향해 내딛고 있다. 아주 높디 높은 산으로 말이다. 조금만 때를 기다리자. 이 경기침체의 고통은 곧 다가올 놀라운 기쁨으로 잊을 수 있을 것이기에 말이다.

모두들 힘들다. 나만 힘든 게 아니다. 죽음 앞에까지 가본 사람만이 삶의 기쁨을 온전히 경험할 수 있지는 않을는지. 아직 정상에 이를 때는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이제 거의 다 올라온 건 아닐까.

정상이 코 앞인데 우리는 여기서 좌절하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캐츠킬에서 전나무 숲의 향기를 맡으려면 반드시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 정상에 올라가야만 경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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