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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수상] 어머니를 생각하며

엄대용/마켓스퀘어장로교회 목사

어머니! 누구나 부를수록 뭉클해지고 눈물이 나오려고 한다. 어머니란 말처럼 사람들에게 감동과 감명을 주는 다른 이름이 있을까.

왜 일까? 세상에 태어나 제일 먼저 배운 말도 엄마, 제일 먼저 몸의 체취를 느낀 사람도 엄마, 넘어졌을 때 무심코 나오는 말도 엄마, 외로울 때, 아플 때 어머니가 절실히 그리워진다.

세상이 다 나를 버려도 어머니는 절대로 버리지 않는다.

5월에는 마더스데이가 있어 더욱 어머니를 생각나게 한다. 필라델피아에 살았던 안나 리스 자비스는 1908년 5월 어머니가 20년 이상 주일학교 아이들을 가르치던 웨스트 버지니아 그래프톤 감리교회 목사님에게 편지를 보냈다.



1905년 5월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추모하는 예배를 부탁하면서 아울러 믿음의 어머니들을 기쁘게 해드리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글을 썼다. 하워드 목사는 즉시 요청을 받아드리고 어머니들을 위한 예배를 드렸다. 안나는 생전에 어머니가 좋아하던 붉은 카네이션을 예배에 참여한 모든 어머니들에게 달아 드렸다. 이 아름다운 뜻의 예배가 전국적으로 퍼져나갔고, 1914년 우드로우 윌슨 대통령에 의해 5월 둘째 주일이 마더스데이로 공식적으로 선포되었다.

어머니는 내가 두 살 때인 24세의 아주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셨다.

해방 전 그 어려운 시기에 어린 남매와 함께 가계를 이끄는 무거운 짐에 대한 두려움이 무척 컸을 것이다. 혼자 된 어머니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셨고, 우리는 서울 신설동 감리교회에서 믿음의 생활을 시작했다. 어머니는 저녁을 먹은 후, 매일 어린 남매를 데리고 가정예배를 인도하셨다. 내가 창신국민학교에 입학하자 그 때부터 나와 누나에게 예배시에 성경을 읽게 하고 기도를 하라고 시켰다.

중·고등학교 시절 나는 내 친구들의 집을 비교하면서 ‘왜 우리는 이렇게 가난한가’하고 원망도 했었다. 내가 조금 어머니 눈에 만족치 못한 행동이 있으면, 어머니는 마루에 엎드려 기도하는 시간이 유난히 길어졌다. 나는 불안했고 일어난 어머니에게 ‘잘못했다’고 사과 드렸다. 나에 대한 말 없는 훈계였다.

미국 와서 내가 신학 공부하던 어려운 시기에 가계에 도움이 되기 위해 베이비시터를 하셔서 허리가 몹시 굽어지셨다.

어머니와 아내, 두 딸, 5식구의 가정예배는 내게 이어졌고, 소천하신 어머니와 대학 졸업 후에 멀리 떠나 사는 두 딸이 없는 지금, 나와 아내는 지금도 저녁마다 둘이서 가정예배를 본다. 그리고 어머니 이야기를 한다. 보이는 유산은 사라진다. 보이지 않는 영원한 유산, 믿음을 자녀들에게 물려주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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