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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매일 5분씩이라도 나라를 생각해 본 일이 있는가"

도산 안창호 <1878~1938>

若欲改造社會 先自改造我窮
<약욕개조사회 선자개조아궁>
만일 사회를 개조하려면 먼저 스스로 자신의 부족함을 개조하여야 한다

도산 안창호 선생의 신상카드. 왼쪽부터 1920년대 중반, 1932년, 1937년 안창호 선생의 모습으로 서거 한 해 전인 1937년 11월 10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모습이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도산 안창호 선생의 신상카드. 왼쪽부터 1920년대 중반, 1932년, 1937년 안창호 선생의 모습으로 서거 한 해 전인 1937년 11월 10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모습이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1월 9일은 가주 ‘도산 안창호의 날’

내일은 도산 안창호 선생의 탄생일이다. 141년 전인 1878년 11월 9일, 평안남도에서 태어났다. 도산은 독립운동가 중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영웅이다. 한국 민족(해외동포 포함) 중 ‘안ㆍ창ㆍ호’ 이름 석 자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지난해 8월 캘리포니아에서는 11월 9일을 ‘도산 안창호의 날’로 제정하는 결의안이 주의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LA흥사단 및 미주 도산 안창호기념사업회,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은 내일 두 번째 기념식을 개최한다. 도산 안창호 선생의 업적과 그의 삶을 되새겨 본다.

계몽교육자? 혁명 투사?

도산은 계몽교육자인가 혁명 투사인가. 두 시각이 공존한다.



우선 계몽교육자로 보는 시각에는 실력양성론과 흥사단 결성이라는 커다란 줄기가 있다. 도산은 일본의 국력과 비교해볼 때 조선의 독립은 요원한 것이라 생각하고 당장 시급한 일은 실력을 양성하여 독립의 기초를 마련하는 일이라고 보았다.

이를 위해서는 선진자본주의 국가가 물질문명을 이룩한 지식을 하루빨리 습득해서 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실업사상을 기르며 산업을 경영할 신민(新民)을 길러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것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인식했다.

한편 1909년 청년운동의 핵심체로 청년학우회를 조직했다. 후에 청년학우회는 해체되고 흥사단으로 결성된다.

도산사상은 교육을 통하여 민족혁신을 이룩하는 데 그 핵심이 있다. 민족혁신은 자아혁신에 의해서만 가능하며 자아혁신은 바로 인격혁신이라고 보았다. 개개인의 인격혁명으로서의 자아혁신은 곧 자기 개조이며 자기 개조가 곧 민족 개조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혁명 투사에 방점을 찍는 쪽에서는 흥사단의 정체성이 수양단체가 아니고 혁명 투사 단체임을 강조한다. 도산은 1929년 상하이에서 '미국에 거주하는 동지 여러분에게'라는 제목으로 보낸 글에서 "흥사단은 평범한 수양단체가 아니라 한국의 혁명을 중심으로 투사의 자격을 양성하는 혁명훈련단체"라고 쓴 글이 이를 증명한다는 것이다. 미주 한인사회를 결집해 독립운동의 강력한 재정적 기반을 마련했으며 대한제국이 망국으로 치달을 때 단신으로 귀국해 1907년 신민회를 세우고 독립군기지를 개척해 갔다. 임시정부를 경영했으며 독립운동계가 사상과 이념의 분란을 거듭할 때 1923년 국민대표회의와 1926년 민족대당촉성운동을 주창하며 독립운동의 위기를 극복해 나갔다. 도산에게 독립 달성이라는 최고 목표를 위해 사상과 이념은 방법이자 수단일 뿐이었다.

도산의 독립운동은 본질적으로 독립전쟁론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그는 오로지 독립전쟁에 의한 독립 달성을 신념으로 삼았다. 도산의 독립운동은 혁명의 역정 그 자체였다.

1923년 연설에서 도산은 "지금 혁명을 공산주의로 하자! 무정부주의로 하자! 복벽(물러났던 임금이 다시 왕위에 오름) 운동을 하자! 하여 각각 자기의 의사를 주장한다. 그러나 그 주장이 다르다고 서로 다투지 말고 우리는 '민족혁명'을 해야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대혁명적 조직'을 성립한 후에 일치적 행동을 취해야 할 것이다. 즉 우리 민족을 건지기 위해 개인의 사리에 부치지말고 큰 혁명당을 조직하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라고 외쳤다.

영웅의 일생

도산은 덤덤히 유언을 남겼다. 수감 중 지병으로 가출옥해서 병원에 있을 때였다.

"몸을 혁명운동에 바쳤다고 하면서 더구나 동지들을 옥중에 둔 채 나만 이렇게 뜨뜻한 병실에서 죽기도 죄스럽소. 병이 나아봐야 갈 곳은 감옥뿐이요. 적의 발악이 더 심할 모양이니 이때에 죽는 것이 이 한 몸으로서는 편하오마는…." 직접적 사인은 폐결핵 합병증이었다.

17살 안창호는 1895년 구세학당(救世學堂 경신학교)에 입학해 처음 신학문을 접했고 이후 독립 협회에 가입해 민족 운동에 눈떴다. 24살 때인 1902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캘리포니아 리버사이드에서 힘겨운 고학 생활을 했다. 그러다 1907년 귀국 애국계몽 운동을 펼치게 된다. 신민회 대성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서울과 평양 등 각지를 돌아다니며 뛰어난 웅변으로 청년들의 독립운동에 불을 지폈다. 하지만 일제 탄압이 심해졌고 항일 인사들이 대거 투옥됐다.

도산은 1911년 다시 도미 1913년 5월 13일 샌프란시스코에서 흥사단을 설립했다. 리버사이드에서 오렌지 따는 일을 하면서 임시 정부가 설립되려하자 모은 성금을 가지고 상하이로 떠났다. 1919년 4월 13일 선포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내무 총장에 임명됐다.

도산은 평생 4번이나 투옥됐다.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가 일어나자 '살해 가담 혐의'를 받고 평양에서 긴급 체포된 것이 첫 번째였다. 1927년 만주 지린을 방문한 도산이 '대한 청년의 진로'를 주제로 강연하던 중 무장한 중국경찰에 연행되어 지린 경찰청 구치소에 구금된 것이 두 번째였다. 또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 의거가 일어난 1932년 4월 29일 세 번째로 체포됐다. 일본 경찰은 그해 6월 도산을 국내로 압송했다. 4년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로 인도됐다.

도산은 재판과정에서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피고인은 장차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계속하여 운동을 할 생각이냐"는 판사의 질문에 도산은 단칼에 "그렇소. 앞으로도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하여 운동을 할 생각이오"라고 대답했다. 항소 포기 의사를 밝히면서 "아니 30년 독립운동이 겨우 4년 징역 밖에 남은 것이 없소. 징역 4년이 많다고 생각하지 않소"라고 했다.

사상범만을 별도로 수용한 대전형무소로 이감된다. 하지만 위장병과 신경통 때문에 더 이상 수감생활을 하기 힘들었다. 1935년 가출옥한다. 이후 선생은 전국을 돌며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강연에 나섰다.

도산의 주도로 통합된 단체인 동우회가 국내외의 민족주의자를 결집 광범위한 민족운동을 전개하는 중핵의 역할을 맡고 있다고 일제는 판단했다. 마침 그때는 일제가 대륙침략을 위해 중일전쟁을 일으키려던 때였다. 전쟁을 코앞에 둔 일제는 잔뜩 독이 올랐다. 사전예비단속의 차원에서도 민족운동을 탄압해야 했다. 1937년 도산은 평양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됐다. 대전형무소에서 가출옥한 지 28개월 만에 종로경찰서에 투옥됐다. 일제경찰의 취조와 심문 유치장 생활은 가혹했다. 만신창이가 된 도산은 다시 서대문형무소로 입감됐다. 도산의 건강이 회복할 가망이 없어보이자 '민족 지도자의 옥사'가 부담스러운 서대문형무소 측은 '병보석'으로 급히 출소시켰다.

나이 59세 때인 1938년 3월10일 도산은 그렇게도 사랑하는 조국을 영영 떠나야만 했다. 도산의 유해는 망우리 묘지에 묻혔다.(1973년 강남 도산공원 설립 후 이장)

도산의 살 한점 피 한 방울은 땅속에서 7년여 동안 "대한 독립"을 외쳤고 대한민국은 1945년 8월 15일 해방됐다.

안창호 체포당했을 때, 검사와 심문 내용

검사(이하 검): “너는 독립운동을 계속할 생각이냐?”

안창호(이하 안): “그렇다. 나는 밥을 먹는 것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 먹었고, 잠을 자자는 것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 잤다. 이것은 나의 몸이 없어질 때까지 변함이 없을 것이다.”

검: “조선의 독립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느냐?”

안: “대한의 독립은 반드시 된다고 믿는다.”

검: “무엇으로 그것을 믿느냐?”

안: “대한 민족 전체가 대한의 독립을 믿으니 대한이 독립할 것이요, 세계의 공의가 대한의 독립을 원하니 대한이 독립할 것이요, 하늘이 대한의 독립을 명하니 대한은 반드시 독립할 것이다.”

검: “너는 일본의 힘(실력)을 모르느냐?”

안: “지금 아시아에서 가장 강한 무력을 지닌 나라다. 나는 일본이 무력만한 도덕력을 겸하여 가지기를 동양인의 명예를 위하여서 원한다. 나는 진정으로 일본이 망하기를 원치 않고 좋은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이웃나라를 유린하는 것은 결코 일본의 이익이 아니 될 것이다. 원한 품은 2천만을 억지로 국민 중에 포함하는 것보다 우정 있는 2천만을 이웃 국민으로 두는 것이 일본의 복일 것이다. 그러므로 대한의 독립을 주장하는 것은 동양의 평화와 일본의 복리까지도 위하는 것이다.”

'도산 안창호의 날' 기념식

▶일시: 9일(토) 오전 11시

▶장소: LA한인타운 가든스위트 호텔


김석하 선임기자 kim.sukha@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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