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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 이민 첫 출항…멕시코 노동자 모집 광고도

12월 셋째 주 한인 초기 이민 발자취

멕시코 에네켄 농장에서 일하는 한인 노동자. [재외동포재단 제공]

멕시코 에네켄 농장에서 일하는 한인 노동자. [재외동포재단 제공]

1904년 황성신문에 실린 '멕시코 노동자 모집' 광고.

1904년 황성신문에 실린 '멕시코 노동자 모집' 광고.

사탕수수·에네켄에 온몸 '갈기갈기'
반노예의 삶 극복한 이민 선배 숭고함
1902년 12월22일~이듬해 1월13일
하와이 도착…'미주 한인의 날' 제정

1904년 12월17일 황성신문에
멕시코 이민 '거짓 광고' 7차례 실려


이번 주는 100여 년 전 북미대륙으로 향한 한인이민이 시작된 한 주다. 1902년 12월22일 100여 명이 미국 하와이로 떠났다. 2년 뒤인 1904년 12월 17일에는 멕시코행 이민자를 모집한다는 광고가 신문에 실렸다. 헐벗은 국민은 그렇게 조국을 떠났다. 아니 '떠났다'기 보다는 나라가 '내팽개쳤다'. 당시 이민자들은 하와이와 멕시코 유카탄 반도에서 사탕수수와 에네켄(용설란 일종)을 수확하며 온몸을 갈기갈기 찢겼다. 노예의 삶이었다. 용의 혓바닥 모습 같은 용설란(선인장)의 날카롭고 질긴 잎에 몸은 찢겼지만 그들의 정신은 그것처럼 강하고 단단했다. 한 세기 전 '선배' 이민자들의 발자취를 쫓아 본다.

◆하와이 이민

117년 전인 1902년 12월22일. 살을 에는 차가운 날씨 속에 인천항 부두에 122명이 잔뜩 웅크린 채 서있었다. 일본의 수탈로 혹독한 굶주림이 계속되는 시기였다. 항구 여기저기에는 이민 모집 벽보가 붙어있었다. 그 벽보를 보고 모여든 사람들이었으리라. 벽보에는 '하와이는 기후가 온화해 극심한 더위와 추위가 없고 무료 교육을 받을 수 있으며 일년내내 어떤 절기든지 직업을 얻기가 용이하다'고 적혀 있었다.



'그래 가자! 춥고 배고프고 어수선한 이 세상 밖이라면 어디라도 좋다'. 122명의 가슴 속엔 뜨거운 희망이 끓어 올랐다.

20여 일간 항해를 거쳐 대한민국 최초 공식 이민단은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1903년 1월13일. 이날을 기념하고자 2004년 캘리포니아 주의회가 정부기관으로서는 처음으로 '미주 한인의 날'(Korean-American Day)을 제정했다. 다음해에는 연방의회가 만장일치로 제정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미 전국 한인사회의 이날을 기념하는 축하행사는 하와이 사탕수수 밭에서 반노예 생활을 하며 새로운 역사를 개척한 선조들의 노고에 대한 '묵념'이다.

◆멕시코ㆍ쿠바 이민

114년 전 오늘(1904년 12월 17일) 황성신문에 멕시코 이민 모집 광고가 실렸다.

"북미 묵서가(墨西哥.멕시코)는 미합중국과 이웃한 문명 부강국이니 수토(水土)가 아주 좋고 기후도 따뜻하며 나쁜 병질이 없다. 그 나라에는 부자가 많고 가난한 사람이 적어 노동자를 구하기가 극히 어려우므로 근년에 일(日).청(淸) 양국인이 단신 혹은 가족과 함께 건너가 이득을 본 자가 많으니 한국인도 그곳에 가면 반드시 큰 이득을 볼 것이다."

황성신문이 어떤 매체인가.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알리고 이토 히로부미와 을사오적 친일파들을 규탄하는 주필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이날에 목놓아 통곡하노라)'이라는 명문을 실었던 신문이다. 하지만 이런 권위 있는 신문의 노동자 이민 광고는 '새빨간 거짓'이었다. 광고는 이날부터 이듬해 1월 13일까지 7차례 실렸다. 아울러 대한매일신보도 '4년 계약 주택 무료 임대 높은 임금'이라거나 '부녀자에게는 닭을 치게 하고 하루 노동 시간은 9시간이며 계약 기간이 끝나면 보너스로 은화 100원을 지급한다'는 등의 광고를 내보냈다.

실상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1905년 4월 4일 영국 선박 일포드 호를 타고 제물포항을 떠난 한국인은 1033명. 성인 남녀가 각각 702명과 135명이었고 어린이가 196명이었다. 멕시코 서부 살리나크루스항에 닻을 내린 것은 5월 8일이었다. 태평양을 건너는 도중 어린이 2명과 남자 어른 1명이 숨지고 아기 1명이 태어나 1031명이 멕시코 땅을 밟았다. 이들은 기차와 배를 갈아타고 5월 15일 멕시코 남동부 유카탄반도의 메리다 시에 도착했다.

노동자들은 새벽부터 해질 녘까지 뜨거운 사막에서 가시투성이인 에네켄 잎을 잘라내야 했다.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채찍질이 가해졌고 견디다 못해 도망쳤다가 붙잡히면 감옥에 갇혔다. 집세도 따로 내야 하는 데다 임금은 멕시코까지 오는 비용을 갚기도 빠듯했다.

황성신문은 참상을 전해 듣고 광고를 게재한 이듬해 1905년 7월 29일 사설을 냈다. "멕시코 원주민인 마야족의 노예 등급은 5~6등급 한인 노예는 7등급으로 가장 싼값이다. 조각난 옷을 걸치고 다 떨어진 짚신을 신었다. 농장에서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무릎을 꿇리고 구타해서 살가죽이 벗겨지고 피가 낭자한 농노들의 그 비참한 모습을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도다. 통탄 통탄이라." 시일야방성대곡 말미에 '노예 된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원통하고 원통하다'라는 글과 같은 논조였다.

1909년 5월 4년의 계약 기간이 끝났지만 조국은 사실상 국권을 빼앗겼고 돌아갈 여비도 없어 새로운 조건으로 재계약하고 눌러앉을 수밖에 없었다. 이 가운데 274명은 1921년 쿠바로 건너갔다. 그렇게 멕시코 한인 노동자는 중남미 곳곳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살아서 조국으로 돌아온 이민 1세대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멕시코에 팔려간 뒤 돌아갈 곳을 잃은 이들과 텅 빈 영혼의 대한제국에 남아 일제의 지배를 받던 이들. 두 부류 가운데 누가 더 운이 좋은 것이었을까.

멕시코 이주 노동자는 단발(1차 모집)로 끝났다. 그런데 이것이 남아있던 사람에게는 더 큰 불행이었다. 뒤따라 오는 한국인 이민자가 없어 모국과 단절되고 고립되는 바람에 정체성을 빨리 잃어버린 것이다. 남녀 성비도 맞지 않아 현지인과 결혼을 많이 하다 보니 2세와 3세로 내려가며 대부분 현지화됐다. 한국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한국인이 첫 발을 내디딘 멕시코 메리다 시의회는 올해부터 5월 4일을 '한국의 날'로 제정하는 조례안을 만장일치로 가결했다. 또 중심지의 도로를 '대한민국로(路)'로 명명했다.

◆현재 한인 이민사회

불과 한 세기 만에 저 밑바닥에서 현재의 위상을 갖게 됐다.

미 전역 곳곳에서 한인 정치인들이 다수 배출되고 있고 경제적으로는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몇 개는 살 만한 '큰 손' 한인들이 즐비하다. 맛집에선 한식을 먹고 한류로 흥을 돋우는 타인종이 수두룩하다. 한인사회는 현재 정치.경제.문화의 세 마리 토끼 '뒷다리'는 다 잡은 셈이다.

앞으로 100년은 그 탄력 있는 근육으로 어떤 분야를 치고 나갈지 모를 일이다. 뒤에는 하와이 유카탄 반도 한인 선조의 혼이 튼튼하게 받치고 있다.


김석하 선임기자 kim.sukha@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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