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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네소타대학, 전쟁 후 '한국 재건' 이끌었다

6·25 70주년 특별기획(2) 미네소타에서 핀 한국의 꽃

휴전 후 대규모 '프로젝트'
서울대에 교육 원조·교류

한국의 재건을 위한 미네소타프로젝트는 서울대학교와 미네소타대학간의 학문, 기술 등 다양한 분야의 교류를 촉진했다.  이 사진은 당시 미네소타 프로젝트의 행정을 총괄했던 아서 슈나이더 박사(앞줄 왼쪽에서 네번째)가 서울대학교로부터 명예 박사 학위를 받고 기념촬영을 한 것이다. 이 사진 역시 미네소타대학 기록보관소 1번 박스, 7번 폴더에 보관돼있다. [미네소타대학 제공]

한국의 재건을 위한 미네소타프로젝트는 서울대학교와 미네소타대학간의 학문, 기술 등 다양한 분야의 교류를 촉진했다. 이 사진은 당시 미네소타 프로젝트의 행정을 총괄했던 아서 슈나이더 박사(앞줄 왼쪽에서 네번째)가 서울대학교로부터 명예 박사 학위를 받고 기념촬영을 한 것이다. 이 사진 역시 미네소타대학 기록보관소 1번 박스, 7번 폴더에 보관돼있다. [미네소타대학 제공]

미네소타주와 한국의 인연은 '열매’를 맺었다.

미네소타대학이 서울대학교를 돕기 위해 당시 연방정부 산하 해외사업관리처와 맺은 프로젝트 계약서다. 1954년 9월28일 작성됐다. 이 계약서는 미네소타대학 기록보관소 1번 박스, 1번 폴더에 보관돼있다. 미네소타프로젝트는 여러 분야에서 교류가 이루어졌다. 1957년 10월23일자 포스트가젯 기사다.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서울대학교 학생들의 예술품이 미네소타대학을 비롯한 피츠버그대학에서 전시회를 진행한다는 내용이다. 이 신문 기사는 미네소타대학 기록보관소 89번 박스, 7번 폴더에 보관돼 있다. [미네소타대학 제공]

미네소타대학이 서울대학교를 돕기 위해 당시 연방정부 산하 해외사업관리처와 맺은 프로젝트 계약서다. 1954년 9월28일 작성됐다. 이 계약서는 미네소타대학 기록보관소 1번 박스, 1번 폴더에 보관돼있다. 미네소타프로젝트는 여러 분야에서 교류가 이루어졌다. 1957년 10월23일자 포스트가젯 기사다.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서울대학교 학생들의 예술품이 미네소타대학을 비롯한 피츠버그대학에서 전시회를 진행한다는 내용이다. 이 신문 기사는 미네소타대학 기록보관소 89번 박스, 7번 폴더에 보관돼 있다. [미네소타대학 제공]

미니애폴리스 다운타운에서 서쪽으로 20여 마일 떨어진 차스카 지역에는 미네소타대학교 농과대학 부속 식물원(MLA)이 있다. 그곳에 핀 라일락(lilac)의 공식 이름은 ‘미스 김(Miss Kim)’이다.

미네소타에서 태양광 회사 EVS를 운영하는 김권식 대표(서울대 61학번)는 “한국 전쟁 후 미네소타대학 농대 교수들이 한국에 나가 가르치고 돌아오면서 가져왔다. 이곳에는 한국 식물들이 아주 많다”며 "1950년대 진행됐던 ‘미네소타 프로젝트’의 흔적 중 하나”라고 말했다.

휴전 협정 체결 뒤 1년여 만이었다. 미네소타주는 ‘한국(Korea)’과 다시 한번 인연으로 묶인다.



미네소타대학교 기록 보관소에 따르면 당시 미국 정부 산하 국제협력국(ICA)은 미네소타대학과 3년간 계약을 맺었다. 1954년 9월28일이었다. 미네소타대학은 한국 전쟁 후 원조 계획의 일환으로 서울대학교에 ▶의과 대학 ▶농과 대학 ▶공과 대학 분야에서 집중적으로 학문과 기술을 전수하는 프로그램을 시행한다. 일명, ‘미네소타 프로젝트(Minnesota Project)’다.

미네소타대학 기록보관소 담당 캐서린 모켄은 “미네소타대학은 첫 계약 당시 연간 75만 달러를 이 프로젝트에 투입했다. 현재 가치로 보면 매해 710만 달러 가량”이라며 “한국에서는 '미네소타 프로젝트’로 알고 있지만 원래 이곳에서는 ‘코리안 프로젝트’ 또는 ‘한국 협력 프로젝트(Korean Cooperative Project)’로 불렸다”고 말했다.

당시 한국은 전쟁으로 모든 게 황폐화됐다. 원조와 재건이 절실했다. 궁극의 방향은 자립과 발전으로 가야했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미네소타대학은 서울대학교의 교수, 조교 등을 미국으로 불러들여 짧게는 3개월, 길게는 4년 간 연수의 기회를 제공했다. 물론 미네소타대학이 교육과 숙식을 포함, 모든 비용을 전액 부담했다.

미네소타대학 필립 듀다스 도서관 정보 담당은 “서울대학교에서 이곳으로 오기만 한 게 아니다. 당시 미네소타대학에서는 59명의 교직원을 한국으로 파견했다”며 “전략 개발, 교육 행정 등 각 분야의 체계 정비, 자문, 지원 등을 위해 한국에도 인력을 보냈다. 이후 당초 계약 분야 외에 수의학, 공공 행정학, 예술 분야까지 다양한 분야로 교류가 확대됐다”고 말했다.

실제 미네소타대학 기록 보관소에는 1957년 1~2월 사이 와이즈먼 미술관(당시 미네소타대 미술관)에 서울대학교 학생들의 회화, 수묵화, 도자기 등의 작품이 전시됐다는 자료도 남아있다.

캐서린 모켄 기록보관 담당은 “그와 반대로 ‘미네소타 투 코리아(Minnesota to Korea)'라는 주제로 이곳의 작품이 서울대학교에 전시되기도 했다. 당시 미네소타대학의 작품은 경상도, 전라도 등 각 지방에서 순회 전시회를 통해 소개되기도 했는데 그만큼 한국과의 교류는 다양한 분야에서 이루어졌다”고 말했다.

미네소타 프로젝트는 공식적으로 8년간 이어졌다. 1961년까지 총 226명의 서울대 교직원이 미네소타대학을 다녀갔다. 그 중 15명이 박사 학위, 68명은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인연은 프로젝트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미네소타주에 서울대 출신이 아직도 많은 이유다.

GES컨설팅 지형범(서울대 77학번) 대표는 “우리 학번에서도 미네소타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동기가 꽤 있다”고 말했다.

지 대표는 “프로젝트 당시 미네소타대에서 교육받은 이들 대부분이 미국에 남지 않고 한국으로 귀국했다. 이들은 이후 학문적, 기술적으로 크게 기여했고 한국 발전의 보이지 않는 토대가 됐다”며 "그들이 바로 ‘이름없는 영웅(unsung hero)’인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아 미네소타대학 역시 지난달 15일 미네소타 프로젝트 관련 자료에 대한 디지털화 작업을 최종 마무리했다. 사진, 편지, 서류 등 수년에 걸친 변환 작업이었다.

도움은 씨앗이다. 먼 훗날 가치를 맺는다. 한국의 ‘오늘'이 미네소타 프로젝트의 열매다.


장열 기자 jang.yeol@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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