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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않아야 합니다…잊지 않겠습니다

[6·25 70주년 특별기획]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
우리가 기억해야 할 70가지

1953년 미 제7사단에 배속되어 활동했던 에티오피아에서온 '강뉴 부대'. [사진 Wikipedia]

1953년 미 제7사단에 배속되어 활동했던 에티오피아에서온 '강뉴 부대'. [사진 Wikipedia]

6·25전쟁이 발발하자 고향을 떠나고 있는 피난민들 [사진 국가기록원]

6·25전쟁이 발발하자 고향을 떠나고 있는 피난민들 [사진 국가기록원]

6·25 발발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전쟁기간은
6·25 발발부터 정전협상까지 1129일. 3년 1개월 2일이다.

6·25 참전국가는
미국을 포함 16개국에서 전투병력, 6개국에서 의료지원팀을 파병했다. 이외에도 40개국이 물자 수송을 지원하고 6개국이 전후 복구를 지원하는 등 여러 가지 방식으로 남한을 지원했다.



병력과 의료 참전국은
미국·영국·호주·네덜란드·캐나다·뉴질랜드·프랑스·필리핀·터키·태국·그리스·남아공·벨기에·룩셈부르크·콜롬비아·에티오피아. 의료지원국은 스웨덴·인도·덴마크·노르웨이·이탈리아·독일.

가장 많은 병력을 파병한 국가
역시 미국이다. 179만 명을 파병했다.

가장 많은 인력을 파병한 미국 주 톱 5
① 뉴욕(48만2000명) ② 펜실베이니아(40만5000명) ③ 캘리포니아(37만9000명) ④ 일리노이(29만8000명) ⑤ 오하이오(27만1000명)
<예비군 비전투병력 포함한 집계>

참전한 유엔군 숫자는
연인원 기준으로 196만 명에 달한다.

가장 적은 수를 파병한 국가
룩셈부르크. 80명을 파병했다. 하지만 룩셈부르크군 전체가 1000명 밖에 안 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상당한 병력을 보내준 것.

라틴 아메리카에서 유일한 전투 병력 파병국
콜롬비아

아프리카 유일의 파병국
에티오피아

에티오피아 특별 부대는
에티오피아는 유엔의 파병요청에 황실 근위대 포함 6000여 명의 최정예 부대를 파병했다. '혼돈에서 질서를 확립하다’ ‘적을 초전에 격파하다’라는 뜻을 지닌 ‘강뉴부대’다. 강뉴부대는 253번의 전투에 출격해 253번 승리를 거둔, 백전백승, 무패의 신화적 부대다. 참전용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강뉴부대가 뜬다는 소식이 들리면 중공군들도 도망을 칠만큼 그 위세가 등등했다.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달려와준 국가는
태국이다. 태국은 가장 먼저 전투 병력을 보냈다. 지상군 해군을 포함 총 6326명을 병력을 파병했다.

전쟁 후, 태국군이 20년간 한국에 남은 이유
태국군은 1953년 7월27일 휴전협정 체결 이후 햇수로 20년, 1972년 6월 11일까지 경기도 포천시 운천면, 강원도 철원 일대에서 UN군의 일원으로 경계임무를 수행했다. UN군 사령부가 6·25 전쟁동안 ‘리틀 타이거’로 불리며 용맹함을 보여주었던 태국군에게 중부전선의 경계임무를 요청했고 이에 태국 역시 이를 받아들여 20년간 남한을 지키기 위해 머물렀다.

한국 정부가 나바호족에게 마스크 전달한 이유
최근 한국 정부가 6·25전쟁에 참전한 미국 원주민 나바호족에게 마스크 1만 장과 5000달러 상당의 식량을 긴급 지원했다. 감사함을 전하기 위함이다. 2차 세계 대전때 ‘코드토커’로 활약을 펼쳤던 나바호족은 한국전에도 800명이나 참전했다.

6·25 전쟁기간 사망한 군인 수
한국군 13만7899명, 미군 3만6940명, 유엔군 3730명이 사망했다.

유엔군 실종자와 포로
실종자와 포로 합쳐 9931명.

민간인 사망자 수
남한 민간인 사망자는 24만 4663명.

학살된 민간인 수
12만8936 명.

행방불명된 남한 민간인 수
30만3212명

서울이 함락되는 데 걸린 시간
3일

전세를 뒤바꾼 작전
인천상륙작전

인천상륙작전
1950년 9월 15일 유엔군이 맥아더 장군의 지휘 아래 인천에 상륙, 낙동강까지 남진한 인민군의 허리를 절단, 섬멸한다는 계획으로 세워진 군사작전이다.

맥아더 장군은 누구
풀네임은 더글라스 맥아더. 태평양전쟁 미군 최고사령관이다. 제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진주만을 기습한 일본을 공격해 항복시키고 일본 점령군 최고 사령관이 됐다. 6·25 전쟁 때는 UN군 최고사령관으로 부임했다.

맥아더 장군이 남긴 명언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작전 후 중공군과 전면전을 두고 트루먼 대통령과 갈등을 빚어 해임됐다. 이때 남긴 명언이 바로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한국전에서 가장 치열했던 전투
영화 ‘고지전’의 배경이 되기도 했던 ‘백마고지’를 꼽는다. 국군 9사단과 중공군 3개 사단이 벌인 치열한 전투다. 전투가 벌어진 10일 내내 백마고지의 주인이 24차례나 바뀔 정도로 치열했던 전투다.

왜 치열해야 했나
백마고지는 서울로 통하는 주요 보급로를 가진 중요한 군사요충지이자 곡창지대였다. 또한 김화-평강-철원 등 철의 삼각지대 중 하나인 철원까지 위협받게 돼 꼭 확보해야 했던 고지였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전투
장진호 전투다. 제2차 세계대전의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함께 세계 2대 겨울 전투로 꼽힌다. 연합군 3만과 중공군 10만명이 맞붙었다. 이 전투로 수많은 사상자를 냈는데 추위 때문에 동사한 군인만 수천명에 달한다.

한강교 조기 폭파
한강교 폭파는 전쟁 발발 나흘만인 1950년 6월 28일 오전 2시40분에 남한에 의해 폭파됐다. 전술의 원칙상 폭파나 차단은 퇴각군의 퇴로를 막기 위해 추격군이 감행하는 법인데 한강교는 남한 측에서 폭파했다. 한강 이북의 많은 시민과 수많은 병력, 군수물자를 방치한 채 서둘러 폭파한데다가 국민에게 이 사항을 미처 알리지 않고 한강교를 폭파해 6·25전쟁의 큰 실책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한강교 폭파로 인한 피해
폭파 당시 한강교 위에만 500~800명의 피난민이 있었으며 50여 대의 차량이 있었다. 또 한강다리가 끊기면서 대다수의 서울시민과 상당수의 국군, 엄청난 전쟁물자가 북한의 수중에 떨어졌다.

당시 남북 군사력 비교(육군)
남한 9만6140명, 북한은 2배로 19만1680명에 달했다.

군장비 비교
남한은 곡사포 91문, 대전차포 140문, 박격포 960문, 장갑차 27대, 전차는 없었다. 그에비해 북한은 곡사포 552문, 전차포 550문, 박격포 1728문, 장갑차 54대, 전차가 242대를 보유하고 있어 엄청난 군사력 차이를 보였다.

참전한 여군(女軍) 수
군번 없이 참전했던 600명을 포함 총 2400명의 여군이 6·25 전쟁에 참전했다.

여군 지원자 수
1950년 9월 창설된 여자의용군 1기 모집에만 8000명이 지원했다.

38선과 휴전선의 차이
38선과 휴전선은 다르다. 38선은 제 2차 세계대전을 끝내면서 미소 양국이 북위 38도 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남과 북으로 나눈 군사분계선이다. 휴전선은 1953년 6·25전쟁 이후 휴전 협정을 맺을 때 북한과 남한의 경계를 나누기 위해 새롭게 지정한 기준선이다.

비무장지대
비무장지대(DMZ)는 휴전선을 중심으로 남북한이 각각 2 km씩 완충지대를 설정해 사람이 무기를 가지고 들어 갈수 없는 지역으로 약속한 곳이다.

정전협상 기간은
1951년 7월 10일 시작됐지만 협상이 난항을 겪으면서 1953년 7월 27일이 되어서야 끝났다.

정전협상 주요 안건은
군사분계선 설정, 외국 군대 철수, 정전감시위원회 설치, 포로송환 방식이 주용 쟁점이었다.

정전협상에 한국이 빠진 이유
한국 정부가 북진 통일을 고집, 서명을 거부했다.

정전협상에 사인한 사람은
인민군 사령관 김일성, 중국 인민 의용군 사령, 미합참의장이 사인했다.

전쟁이 더 일찍 끝나지 않은 이유
전쟁은 1951년 마무리될 수 있었지만 정전 협상으로 지연됐다. 특히 포로 송환문제와 관련 양측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유엔군은 포로들의 선택권을 주장했다. 자신이 돌아가고 싶은 국가를 스스로 결정하자는 것. 그에 비해 북한군·중국군은 포로의 의사와 상관없이 본국으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원칙을 내세웠었다.

정전회담이 53년 6월 중단됐던 이유
유엔군의 포로 가운데 한국이나 대만 등에 남기를 희망하는 이들을 반공포로라고 불렀는데 53년 6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과 유엔군의 동의 없이 2만 7000여 반공포로를 석방했다. 반공포로들이 자유진영에 남지 못할 것을 우려한 결단이었지만, 전 세계가 이 대통령의 조치에 경악했고 이로 인해 회담마저 중단됐다.

경제적 피해 규모는
재산 피해도 추산이 어려울 정도다. 북한군에 밀려 마지막 교두보로 삼았던 부산을 제외한 전 국토가 초토화됐다. 제조업 42%가 파괴됐고, 군사작전에 이용될 수 있는 도로, 철도, 교량, 항만, 학교 등은 물론 가옥도 대부분 파괴돼 사회 경제체제의 기반과 함께 국민은 생활터전을 잃었다.

전쟁 직후인 1953년 한국 국민총소득은
1953년 1인당 76달러.

1953년 국내총생산(GDP)은
1953년 477억 원에서 2019년 현재 1919조 원으로 4만 배 가까이 증가했다.

6.25 이산가족 수
1988년 이산가족 신청을 받기 시작한 이래 지난 5월까지 집계된 자료에 따르면 이산가족 등록인 수는 13만3386명이다.

이산가족 중 남은 생존자는
고령화로 이제 5만1367명만이 남았다.

미주 한인 이산 가족은
미주 한인 이산가족 10만명 중 62%가 80세 이상으로 고령자. 이산가족 상봉 참가자격이 한국과 북한 국민으로 제한되어 있어 미주 한인은 만나지 못하고 있다. 현재 연방 상원에 ‘한국전쟁 이산가족 상봉 법안’이 상정되어 있다.

전장고아
남한만 5만여 명, 남북 합치면 10여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

전쟁 고아 어떻게 됐나.
남한의 경우에는 상당수가 고아원이나 외국 양부모의 손에 맡겨졌다. 북한은 만경대혁명학원 같은 국립시설 또는 외국 국립양육기관에 맡겨졌다.

북한 전쟁고아를 수용해준 나라
폴란드 6000명, 루마니아 3000명, 헝가리 950명, 동독 600명, 체코슬로바키아 400명, 불가리아 500명이다.

6.25로 잃은 문화유산
수많은 문화 유산이 파괴됐다. 아이러니한 것은 소중한 문화 유산의 상당수가 국군과 미군에 의해서도 훼손됐다는 점이다. 1951년 1.4 후퇴 당시 미군이 사찰들에 빨치산들이 머무를 수 있다고 판단해 모두 폭격하거나 방화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때 70개 이상의 사찰과 그곳에 있던 불상과 탱화 등이 모두 잿더미가 됐다.

팔만대장경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
많은 유산들이 불탔지만 유네스코 등재 세계문화유산과 세계기록유산인 해인사 장경판전(국보 제52호)과 고려대장경판(팔만대장경·국보 제32호)이 지켜질 수 있었던 데는 남다른 사연이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8월 공군 제10전투비행 전대장 김영환 대령에게 폭격 명령이 떨어졌다. 이 역시 가야산에 숨어든 인민군 소탕을 위한 지시였다. 하지만 김 대령은 폭탄 투하 지점이 팔만대장경을 보관한 해인사라는 점을 알게 되자 기수를 그냥 돌렸다. 빨치산 몇 명 죽이기 위해 소중한 우리의 문화유산을 불태울 수 없다고 항명한 것. 김 대령은 “영국 사람들은 ‘셰익스피어는 인도와도 바꿀 수가 없다’고 말한다. 해인사 팔만대장경은 셰익스피어와 인도를 다 줘도 바꿀 수가 없는 보물 중의 보물이다. 전쟁으로 불태울 수는 없었다”고 말했다.

6.25관련 볼만한 영화
▶인천 상륙작전
제목 그대로 인천상륙작전을 소재로 한 영화로 2016년에 개봉, 700만 관객을 동원했다. 5000대1의 성공확률로 전쟁의 역사를 바꾼 인천상륙작전의 이면에 숨겨진 영웅들을 그렸다. 이정재, 이범수, 정준호 등 쟁쟁한 배우들이 출연했고 맥아더 장군역에는 할리우드 배우 리암 니슨이 맡아 관심을 끌었다.

▶‘장사리: 잊혀진 영웅들’
인천상륙작전을 배경으로 한 또 다른 영화다. 곽경택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로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 투입됐던 역사에 숨겨진 772명의 학도병의 이야기를 그렸다.

▶국제 시장
2014년에 개봉해 1400만 관객을 동원했던 영화(주연 황정민). 1950년대 한국전쟁부터 현재까지 격변의 시대를 살아온 주인공 ‘덕수’를 통해 우리 시대의 아버지상을 그려냈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피난을 가던 중 아버지, 어린 여동생과 이별을 맞는 덕수가 꿈을 포기하고 오직 가족을 위해 살아가는 과정을 담았다.

▶아일라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터키 영화다. 아일라는 한국 전쟁 당시 유엔군으로 참전한 터키 병사 슐레이만과 5살 고아 아일라의 우정을 담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실제 주인공인 슐레이만과 아일라(김은자씨)는 헤이진지 60년 만인 2010년 다시 만나 화제가 되기도 했다.

6.26 관련 서적
▶백선엽을 말한다
딱 10년 전 60주년 때는 많은 관련 서적들이 출판됐다. 그에 비해 70주년인 올해는 여느 해보다 잠잠하던 참에 출간된 귀한 책이다. 전 중앙일보 논설위원이자 중국인문경영연구소 소장 유광종씨가 대한민국 최초 4성 장군 백선엽 대장의 삶을 긍정적 측면에서 다룬 평전이다. 평안남도의 말 없던 소년 백선엽이 대한민국 최초로 네 개의 별을 달기까지의 역경과 고난, 그리고 영광을 외교안보 선임기자였던 유광종의 시선으로 담아냈다.

▶조지 할아버지의 6.25
동화작가 이규희씨가 어린이들에게 6.26의 역사를 알려주기 위해 펴낸 동화책이다. 미국에서 한인 3세대로 자란 영후가, 유엔군으로 6·25전쟁에 참전했던 조지 할아버지를 통해 6·25전쟁에 대해 알게 되고 한국의 가슴 아픈 역사와 자신의 뿌리에 대해 깨닫게 되는 이야기다.

▶목마른 계절
박완서의 작품세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소재가 바로 6.25전쟁이다. 그의 책에는 6.25전쟁을 소재로 하는 작품들이 여럿이다. 그 중 한 권이 바로 목마른 계절이다. 1972년 잡지 ‘여성동아’에 ‘한발기’라는 제목으로 연재, 1978년 수문서관에서 ‘목마른 계절’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됐다. 전쟁 발발부터 9.28 서울 수복 → 이듬해 1.4 후퇴 → 그리고 5월까지. 1년간의 서울에서의 경험을 인민군에 부역하는 여대생 진이의 시각에서 그려냈다.

6.25 소재 명작
▶김환기 ‘피난 열차’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로 꼽히는 김환기도 6.25를 화폭에 담아냈다.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그린 피난 열차. 비극적인 상황과는 정반대로 앙증맞은 사각형의 기차 속에 사람들이 빼곡히 들어차있는 모습이 귀엽게 표현됐다. 김환기는 전쟁 당시에는 부산으로 피난 생활중 해군의 종군화가로 활동했다.

▶파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
20세기 미술계의 거장 피카소도 한국전을 소재로 한 그림을 남겼다. 1951년 작 ‘한국에서의 학살’이다. 한인에게는 ‘게르니카’보다 더 가슴에 와 닿는 작품이다. 이 그림은1950년 10월부터 12월 사이 황해도 신천군 일대에서 벌어졌던 민간인 학살과 연관돼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참고로 피카소는 한 번도 한국에 방문한 적은 없다.

6.25로 탄생한 음식
부대찌개. 6·25전쟁 직후 미국부대에서 쓰고 남은 햄과 소시지를 이용하여 끓여 먹은 찌개다. 또 하나는 밀면이다. 냉면에서 파생된 음식으로 6.25 당시 부산까지 피난 온 이북 실향민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피난민시절 고구마나 메밀 전분이 부족해 미군이 나눠준 밀가루로 면을 만들어 냉면을 해 먹기 시작한데서 유래한다.

용산구 전쟁 기념관
1994년 완공된 용산구 전쟁기념관은 9000여 점의 전쟁 관련 기념물을 전시하고 있는 대표적인 전쟁기념관이다. 전시장은 6개의 구역으로 나뉘어있다. 물과 빛이 어우러지는 호국추모실은 창군 이후 전사한 17만 명의 이름을 담은 장부를 보관하는 엄숙한 공간이다.

부산 유엔기념공원
희생당한 유엔군 군인들의 유해를 안장한 묘지 및 공원이다. 한국군 36명을 포함해 11개국 2297구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다. 주소는 부산 남구 대연동 800.

6.25 미스터리
▶왜 비상경계령이 해제됐나
1950년 6월 남침 동향이 곳곳에서 감지됐다. 때문에 6월 11일을 기해 전군에 비상경계령이 내려졌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전쟁이 발발하기 바로 이틀전인 6월 23일 24시를 기해 경계령이 해제됐다. 이로 인해 수많은 장교과 장병이 외박가 휴가를 나갔다.

▶전 장병의 반이 휴가
육본은 비상 경계령 해제와 더불어 전 장병의 2분의 1에게 휴가를 주어 외출과 외박을 시켰다. 황당하게도 육본 정보 분석과에서 북한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보고를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에게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조치를 취했다.

▶24일 장교 클럽 파티
6.25 발발 전날 밤. 육군 장교 클럽 댄스 파티가 열렸다. 육군 장교 클럽 낙성 파티를 연다고 전 후방 고급 장교들에게 초청장을 보냈다. 참석 장교들은 6월 25일 새벽까지 술과 댄스를 즐겼으며, 일부 미 고문관과 한국 장교들은 2차를 가기도 했다고 한다.

▶전후방 부대의 대대적인 교대
6월 13일부터 6월 20일까지 전후방 부대의 대대적인 교체가 진행됐다. 이로 인해 전투를 지휘해야 할 지휘관들이 지형은 물론 부하들의 신상조차 파악할 수 없었다. 교체도 단계적 절차가 필요한데 많은 부대를 동시에 교대하는 바람에 전력 공백이 야기됐다는 분석이다.

미등록 참전유공자 신청
국가보훈처는 지금도 미등록 참전유공자를 발굴하고 있다. 지난 2014년부터 2020년 5월말 현재 생존해 있지만 제도를 알지 못해 신청하지 못한 참전유공자 5,222명을 발굴하여 참전명예수당 지급 등 예우와 지원을 하고 있다.

전쟁은 언제 끝났나
6.25는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이다.


오수연 기자 oh.sooyeon@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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