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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수] 한국인 이름 딴 학교 LA에 줄줄이 탄생

남기고 싶은 이야기 - 민병수 변호사
<11> 공립학교에 한인 이름 명명

지난 2006년 찰스 김 초등학교 명명식 당시 찍은 기념사진. 왼쪽부터 민병수 변호사, 고 김지수 이사, 샌드라 김 교장, 권기상 남가주한인재단 총무, 고석화 재단 이사장, 데이지 김(찰스 김 친손녀), 안성주(외손자). [사진제공=민병수변호사]

지난 2006년 찰스 김 초등학교 명명식 당시 찍은 기념사진. 왼쪽부터 민병수 변호사, 고 김지수 이사, 샌드라 김 교장, 권기상 남가주한인재단 총무, 고석화 재단 이사장, 데이지 김(찰스 김 친손녀), 안성주(외손자). [사진제공=민병수변호사]

“초교 이름에 전쟁영웅 곤란”
‘김영옥 대령→찰스 김’ 선회
미주 한인의 날 제정문 부탁
모두 외면…결국 밤샘 집필


미주 한인의 날 제정이 성공적으로 끝난 후 민병수 변호사는 다시 한번 기록을 남기는 일을 한다. 바로 신규 공립학교의 이름을 한인 이민자의 이름으로 명명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1곳이 아닌 3개교에 달한다.

찰스 김의 생전 모습.

찰스 김의 생전 모습.

민병수 변호사는 당시 학교 신축붐을 타고 2006년 옥스퍼드와 2가에 신축된 초등학교 이름을 ‘찰스김 초등학교(Charles H. Kim ES)’로 명명한데 이어, 2009년엔 윌셔와 샤토에 오픈한 중학교 이름을 ‘김영옥 중학교(Young Oak Kim Academy)’로, 2013년에는 버몬트와 버질 애비뉴에 세운 의료 매그닛 초등학교를 ‘닥터 새미리 매그닛(Dr. Sammy Lee Magnet)’으로 명명하는데 성공했다.

2000년 대 초반 LA통합교육구(LAUSD)는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학생들을 수용하기 위해 대규모 학교 신축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학교마다 한 반 학생 수가 평균 40~50명에 달했고 일부 학교는 2부제로 나눠 운영할 만큼 열악한 환경이었기에 LA교육위원회는 33억 달러 규모의 재정을 확보할 수 있는 채권발행안을 통과시키고 총 80개의 신규 학교를 건축했다. 당시 한인타운에 들어선 학교 수만 15개에 달한다.



한인 커뮤니티는 신축 학교 플랜을 반기면서도 비즈니스 중심가인 한인타운에 학교가 들어설 경우 발생할 경제적 타격에 대한 우려가 컸다. 실제로 학교 부지에서 운영하던 수십 곳의 한인 업소가 이전해야 했고, 이 과정에서 이주비용 등의 문제로 교육구를 상대로 한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김 교장의 결정적 조언

신축 학교 프로젝트에 따라 한인타운에는 속속 학교가 오픈했다. 버몬트와 뉴햄프셔가의 프랭크델올모초등학교를 시작으로 ▶12가와 호바트의 LA초등학교 ▶윌셔와 윌튼코너의 윌셔파크 초등학교 ▶놀만디와 올림픽 불러바드의 마리포사-나비 프라이머리센터 ▶베벌리 불러바드와 하버드의 하버드 초등학교 ▶파크뷰와 윌셔 불러바드의 찰스 화이트 초등학교 등이었다.

옥스퍼드와 2가에 신축 중이던 초등학교도 곧 완공을 앞두고 있었다. 2006년 초였다. 남가주 미주한인재단 회장이었던 민 변호사는 2세들과 아이디어를 모았다. LAUSD 커뮤니티 홍보 담당이었던 홍연아씨, 미주한인재단 총무를 맡았던 권기상 가디나시 커미셔너와 회계였던 알렉스 차 변호사가 주축이 됐다. 또 한 명 빠뜨릴 수 없는 사람이 있다. 나중에 찰스 H. 김 초등학교의 초대 교장으로 부임했다 목사인 남편을 따라 한국 부임지로 가면서 은퇴한 샌드라 김씨다. 처음에 민 변호사는 김영옥 대령의 이름을 생각하고 물밑작업을 벌였다. 그때 김 교장의 조언으로 ‘찰스 김’으로 변경한다.

“샌드라 김씨가 초등학교에 전쟁 영웅의 이름을 추천하면 실패할 거라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초등학교 이름에 전쟁 영웅의 이름은 없다. 그때 조언을 듣지 않았다면 우리 프로젝트는 100% 실패했다.”

찰스김 초등학교 명명 프로젝트는 빠르지만 조용히 진행됐다. 재단 이사였던 고 김지수 전 한미교육재단 이사장이 제공한 한국어 자료를 2세 회원들이 영어로 번역해 교육구에 제출했다. 지역 주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홍보활동을 펼치는 한편 한인 교회와 커뮤니티 단체들의 도움으로 서명운동을 진행했다.

2006년 9월 12일. LA통합교육위원회는 옥스퍼드와 2가의 초등학교 이름을 ‘찰스 H. 김 초등학교’으로 짓는 명명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한인타운에 세워진 학교에 한국인 이름을 달자는 아이디어에 의기투합한 1세와 1.5세, 2세들의 노력이 결실을 보는 순간이었다. 무엇보다 누구도 생각해 보지 못한 일이었기에 한인 사회에 주는 의미는 컸다.

정치권 활동 2세들의 가교

민병수 변호사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미국에 온 나이를 따지만 1세가 맞지만, 미국화된 사고방식을 갖고 공부하고 생활했기 때문에 2세에 가깝다”고 밝혔다. 그래서인지 2세들과 함께 일하는데 스스럼이 없었다. 따지고 보면 민 변호사가 한국에서 제대로 교육을 받은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어릴 때는 식민 시절이라 일본인 교사가 일본어로 가르치던 학교에 다녔고 해방 후 잠시 경기중학교에 다니다 가족과 함께 미국에 왔기 때문이다.

민 변호사를 통해 정부나 기관에서 일하던 2세들이 커뮤니티를 연결하는 징검다리가 됐다. 이들 중에는 한인으로 첫 LA 시의원으로 당선된 데이비드 류 시의원도 있다. 류 시의원은 한인타운을 관할하는 LA카운티 2지구의 수퍼바이저로, 남가주에 정치적 영향력이 컸던 흑인 여성 정치인 이반 버크 수퍼바이저의 보좌관이었다. 류 시의원은 ‘미주 한인의 날’ 제정을 비롯해 한인 커뮤니티에 필요한 다양한 관심 사항을 수퍼바이저에게 전달해 한인사회가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민 변호사는 존 최 전 LA시장 보좌관도 언급했다. 민 변호사는 “꽤 똑똑하고 진실한 청년이었다. 한인 커뮤니티를 위해 돕고 싶어하던 마음이 뜨거웠다”고 함께 일한 기억을 떠올렸다.

17년째 의회서 선포되는 결의문

민 변호사가 작성한 ‘미주 한인의 날’ 결의문은 당초 주류사회에서 인정받고 활동하는 2세들에게 맡겨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미주한인재단 이사진이 손꼽은 인물은 아시안 최초로 미국 신문기자로 이름을 떨치던 이경원 대기자, 초대 하와이 이민자 자손이자 하와이주의 첫 한인 대법관으로 임명된 문대양(영어명 로널드) 대법원장, 피플매거진 최초 한인 에디터였던 이민지씨. 추진위원장이었던 민 변호사는 재단을 대표해 이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발송했다. 하지만 이 대기자는 편지를 받고 전화를 걸어 이리저리 내용을 질문할 뿐 참여 의사는 뚜렷하게 보이지 않았다. 이 에디터의 경우 비서를 시켜 전화하고는 그 후 연락을 끊었다. 문 대법원장은 아예 봉투도 뜯지 않고 반송했다.

민 변호사는 “변호사 사무실 봉투를 사용했는데 그걸 보고 반송한 것 같았다. 판사로서 조그만 오해가 발생할 수 있는 여지도 차단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시간만 흘러가고 진전은 없었다. 민 변호사는 직접 결의문을 작성하기로 마음먹고 문서에 담을 내용을 조사했다. 밤새 쓴 그의 결의문에는 미주 한인 초창기 이민사, 언어 및 문화적 차이를 극복하고 일군 아메리칸 드림, 미국 사회에 기여한 역할과 미래를 담았다. 2003년 LA시와 가주 의회에 미주 한인의 날이 선포한 지 17년째. 지금도 매년 1월 13일 주의회와 LA시, LA카운티 의회장에서 그가 쓴 결의문이 선포되고 있다.


장연화·장수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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